讀: 축적

[독후감] 쇳밥일지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3. 1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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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YES24

 

책을 다시 읽기로 결심한 지 나흘 만에 간신히 한 권을 읽었다. 읽은 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양에 대한 욕심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빵빵한 지적 허영심에 비해 홀쭉한 노력이지만 다시 움직인 게 어디냐 싶다. 천현우의『쇳밥일지』에는 전혀 몰랐거나, 머리로만 알았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 283쪽에 등장하는 '포터 아저씨'의 말이 책의 특징을 명쾌히 설명한다.

 

우리 판때기에서만 쓰는 말들이 있잖냐?
그 상스러운 걸 칼럼에다 그대로 다 실을 순 없잖어.
그렇다고 먹물들 말로 쓰면 맛이 안 살고.
그 중간 언어를 찾아야 하는데 니가 그걸 잘 하더란 말이지


 

저자는 대다수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요소들이 '기간제 상품'이었다고 할 만큼 삶의 최전선을 걸어왔다. 그는 마산에서 실업계, 전문대, 공장 등으로 표상되며 소위 '먹물'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시절의 동급생이 대학에 가려는 친구들의 선택까지 낮잡기 일쑤였다는 것만으로도 주변환경이 녹록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파란만장했던 가정환경, 취직 후 삶의 기본적 요소들을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을 때 느낀 쾌감, 젊은 날의 사랑 이야기와 저자의 일기 일부까지 삶의 궤적을 조망할 수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재독을 권하며 기억에 남는 부분을 세 가지 정도 간추려둔다.

 

첫째, 입시 스타 강사의 용접공 비하 발언에 대해 저자가 남긴 일기 속의 몇몇 표현과 통찰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할 게 없는 이력', '사교육의 본질은 보험과 같아, 최악의 상황(성적 경쟁에서 뒤쳐짐)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해야 시장이 커진다', '강사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빌려 튀어나온 세상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한 분노의 본질은 평등을 향한 갈망'이라고 정의하며 우리가 언제든지 경쟁의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는 삶을 산다고 적었다. 신기한 일이다. 좋은 삶에 순위를 매기거나 줄을 세우는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이 표면화되면 대다수는 분노한다. 

 

개인을 빌려 튀어나온 세상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예로 들어 문제를 거론한다면, 그 문제를 숨기고 싶은 이들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며 일축하기 바쁘다. 그러게, 한 스타 강사가 저러한 발언을 날리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옆의 스타 강사는 쪽팔려서 어떡하나. 이처럼 초점을 두기 나름인 부분에 대해서는 해당 발언에 대한 분노의 본질이 '평등을 향한 갈망'이었든, '사회적 성공을 이룬 이에 대한 질투'든, '젊은 사람이 어디 싸가지없이'든 사실 크게 중요치 않은 것 같다. 무엇으로 시작하든 간에 결과적으로 존중받지 못하여 분노한 것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언제든 경쟁의 절벽에서 떨어질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주의 깊게 볼 만한 맥락이었다.  장애인의 대다수가 비장애인이었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 떠오른다. 3루에서 태어나놓고 3루타를 친 줄 안다는 우스개처럼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나 또한 살아본 삶은 나의 삶 뿐인데 남의 삶을 쉽게 바라보고 재단하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된다. 천성적으로 '나 잘났다'고 생각하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어, 알지도 못하면서 타인에 대한 냉소까지 장착하는 후진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존중을 향해 평생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둘째, 저자가 채무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수급자에 관한 정보를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분명하게도, 복지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해당 복지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가 닿지 않는 구석이 있다. 저자가 조금이라도 운이 좋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넘치는 정보를 악용하는 사람은 보조금이든 지원금이든 법의 구멍을 통해 받아낼 방법이 없을지 궁리하는데 정작 필요한 이들은 그 정보를 볼 겨를이 없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그늘진 자리에 복지의 볕이 충분히 닿기란 여러모로 어려운 일인 듯 하다.

 

팬데믹으로 인해 지급된 재난지원금을 비롯하여 각종 복지정책이나 보조금이 국민에게 도달하는 과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복지가 필요한 사람이 핸드폰을 갖고 있거나 유지할 사정이 되지 않는데 복지를 받기 위해 핸드폰 본인인증이 필요하다면 이는 복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저자는 빚더미에 앉아 있는데도 더 좋은 집으로 옮길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해 꽤 자세히 서술했다. 제도적으로 더 나은 형편을 보장받을 수 있음에도 그러한 제도를 알지 못하여 악순환의 굴레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를 다투는 것과 무관하게, 각종 복지의 전달경로를 재점검하는 것도 효과가 꽤 좋지 않을까 한다.

 

셋째, 저자의 삶 속 각종 만남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결국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전부이다. 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거나 근묵자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책을 통해, 좋은 사람을 아주 짧게 만나도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받았다. 같은 공장에 다니지만 대학에 다시 다니라고 이야기해주는 동창, 공장에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본인의 삶처럼 들어주는 교수님, 글과 계속 가까이 있을 것을 권하던 경리 직원 등. 글머리에 저자가 가진 특징을 알아보고 이야기해준 포터 아저씨까지 모두 해당된다.

 

고된 환경에서 꺾이지 않은 것은 온전한 저자의 선택이며 그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을 현재까지 만들어 온 일등 공신은 좋은 전환점을 만들어 준 주변인들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아무런 쓸모가 없겠지만 저자가 만났던 사람들 앞에 만약을 붙여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삶의 방향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평행으로 그어진 선 중 하나의 선을 약간만 비틀어 놓아도 각 선의 거리는 점차 벌어지듯, 저자 주변의 좋은 사람들이 만남을 기점으로 저자의 삶을 아주 조금씩 틀어 놓은 것 같다. 그 다양한 분기점이 부러운 한편으로 나 또한 좋은 사람이 알아봐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래저래 감상이 복잡하고 정리가 잘 되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세계가 갑작스레 물밀듯이 밀려들어와서 그럴 것이다. 평등과 존중을 머리로는 잘 안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게 맞는지 반문해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이야기는 옛날부터 있어 왔다. 들려오는 여러 뉴스와 사회적 구조를 생각하면 표면적으로만 평등하지 않나. 만인은 평등하긴 한데 법 앞에서도 실제로 평등한 게 맞나? 따위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거악을 일소하겠다는 신념이 거악을 만들듯,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계속해야지 어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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