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자마자 잽싸게 정신을 잡았다. 세 번째 벨소리가 들리기 전에 알람을 껐는데 다들 세상 모르고 잔다. 위 침대에 있었던 똠양꿍의 동태부터 살폈다. 역시 세상 모르고 잔다. 누워서 노트북을 보다 잠들었는지 들숨과 날숨에 노트북이 2cm씩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곳의 보안을 확실히 믿고 있거나 노트북이 본체거나. 똠양꿍의 새로운 복근단련법을 뒤로하고 씻을 채비를 했다. 노팅엄행 기차를 타기까지 약 1시간, 세인트 판크라스 역으로 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마냥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잽싸게 샤워실로 내려갔는데 청소중이었다. 아침 청소 시간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매일 10여 분 가량 앞뒤로 움직이는 것 같다. 시간 여유가 없기에 청소 중이라는 팻말만 있고 출입금지라는 말은 없으니 일단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지 잠시 고민했다. 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갑자기 체크아웃 당하면 곤란하므로 우선 다른 샤워장을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며칠 전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기를 잘 했다. 날랜 나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못 씻을 뻔 했구나. 들어가기 전, 안내문을 다시 읽었고 지하 샤워장은 성별이 구분되어 있었다.
안심하며 문을 열자마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담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당황하던 찰나 아담이 미소지으며 짧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무의식적으로 답인사는 제때 했다. 고간을 내어놓고도 초면에 환히 인사하는 문화는 역시 적응되지 않는다. 딱히 내 고간까지 내어놓고 싶지는 않았는데, 기차 시간을 생각하면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황급히 샤워실로 들어섰는데 밸브가 달랐다. 온수 표시도 없는 심플한 알루미늄 밸브라 일단 돌입했다. 뭐 복잡할 것 있나? 사람 사는 것 다 똑같은데 양쪽 방향 중 하나는 뜨신 물이지 않겠나.
않겠다. 에덴 샤워실이 오만한 동양인을 차갑게 꾸짖었다. 도대체 어째서 어느 쪽으로 돌려도 같은 수압의 찬물이 나오는 것인가? 참지 못하고 샤워커튼을 젖혀 아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냉수마찰 앞에서는 별 수 없이 내 고간도 내어놓게 되는 것이다. 아담은 처음과 같이 미소지으며 미리 데워진 온수통의 물이 다 떨어져서 그럴 것이라고 한다. 별 수 있나, 읏추- 읏추- 빨리 씻어야 하는 마당에 샤워 빨리 끝낼 수 있어 좋다고 강제 긍정하며 재빠르게 샴푸와 바디워시를 쓰고 헹구었다. 3분 가량에 샤워를 마무리할 무렵 뜬금없이 샤워기에서 미지근한 물이 나오더니, 이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온수기 성능이 끝내주는 건지 아담이 선악과로 아침을 때운 것인지 궁금해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기차 출발까지 대략 40분, 급히 짐부터 챙겨 밖으로 달음질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버스에서 내려 역으로 가니 25분 정도 남았다. 생각보다 여유롭다고 느끼던 참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전통음료는 못 참지. 10분 기다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를 받아들고 승강장으로 향했다. 플랫폼을 확인하고 QR코드를 태그했다. 게이트를 통과하여 승강장에 도착했는데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뒷골이 서늘했다.
인구밀도가 아무리 낮아도 열차 타는 사람이 이렇게나 없을 리가 없었기에, 잽싸게 역무원을 잡고 티켓을 보여주었다. 여긴 킹스 크로스 역이고 티켓은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란다. 역이 붙어 있어서 걸어가는 데 무리는 없었으나 시간이 다소 촉박했다. 전통음료에 마음을 빼앗겼던 바람에 걸음을 더 재촉해야 했다. 다행히 출발 5분 전에 탑승했다. 여러모로 의문이었다. 도대체 킹스 크로스의 게이트는 어째서 내 티켓을 인식하고도 문을 열어줄 만큼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는가? 아찔할 따름이다. 텅 빈 플랫폼을 보며 '우왁 내가 기차 전세냄ㅋ' 따위의 생각으로 흥을 올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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