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3일차 1 (23.08.17)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30. 20:59
반응형

눈 뜨니 이미 9시가 넘었다. 군단병 시절에는 일과표대로 움직이면 되었는데 딱히 그런 제한이 없다 보니 내 안의 히틀러가 알람을 꺼버린 것이 분명했다. 챙겨간 샘플 샴푸와 함께 세면장으로 갔는데 누군가가 덩그러니 놓아둔 샴푸통을 발견했다. 심지어 거의 꽉 차 있었다. 예비역답게 아나바다 운동을 전파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아니 나도 바르게 살겠다고 변명할 상황만 생길까 싶어 우선 보류했다. 효율을 챙길까 가고픈 곳을 챙길까 하다가 첫 행선지를 토트넘 홈구장으로 정했다. 한때 축구에 몰두하며 열을 올리기도 했고 발재간의 총본산인 프리미어리그의 경기장을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웠다.

런던패스로도 무료 투어가 가능하며 쏘니가 주장이 된 마당에 펄-럭의 민족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했다. 지하철과 버스의 조합으로는 3~40여 분 남짓으로 나왔는데 버스만 타려니 1시간 가까이 걸렸다. 마이클 남작과 런던 지하철의 불편을 같이 겪은데다 빨간 2층버스 위에서 도심을 구경하는 것이 관광에 훨씬 유리하다. 1시간 가량 버스 앞의 풍경을 향해 몸을 구부리고 있다가 'Tottenhem hotspur stadium' 소리가 들려 급히 일어났다. 2층에서 잠시 정신을 놓고 있으면 갑작스레 내려가 하차해야 하여 다소 곤란할 때가 있다.

사회적 존엄의 위기 또한 너무 갑작스레 찾아온다. 아나바다 운동에만 골몰한 까닭에 화장실을 들르지 않고 나왔는데 북한이 남침하듯 갑자기 신호가 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뭐 잘못 먹지도 않았고 불닭볶음탕면을 사긴 했지만 실제로 어제 저녁에 먹은 것은 일본식 카레볶음면 뿐이다. 아무리 펄-럭의 본분을 다하려 했기로서니 어제 잠시 친일을 좀 했다고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것은 위헌이다. 급한 일도 해결할 겸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주변 식당을 찾았다. 내보내는 게 급한 중에 들이는 것을 생각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쩝쩝박사다.

식당의 이름 또한 'Spur restaurant'였다. 토트넘 구장 바로 맞은편에 있었는데 아직 영업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픈했는지 물으니 'Sure'란다. 누군가 백반집에서 '언제 여시나요?'라니 '손님이 말을 건 지금부터'라는 주인장의 응대가 떠오른다. 한국 생활하며 인생 최고의 플러팅을 백반집에서 받았다는 우스개처럼, 나도 잉글랜드 생활하며 잉생 최고의 플러팅을 토트넘 구장 앞 레스토랑에서 받은 셈이다. 영국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일단 앉으라 권하기에 여유로운 얼굴로 'Thank you'한 번 하고 여유롭지 않은 배를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하면 테이블에 앉겠는데 지금 한강 방어선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좌변기에 앉는 것도 앉는 거니까 싶어 다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시간에 쫓기면 둘러볼 시간이 사라진다 했다. 그러니까 화장지가 충분히 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우선 앉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박진영의 뮤직비디오로 볼 때나 재미있을 뿐, 내 상황이 되면 주마등 패키지를 염가에 다시 체험하게 될 뿐이다. 소매치기 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진심을 다해 내 가방을 다시 샅샅이 뒤졌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티칸 입장권으로라도 실질적인 구원을 받아야 할 게 아닌가.

그렇게 중국동방항공이 나를 구했고 바티칸의 구원을 아낄 수 있었다. 물티슈 한 장만 달라고 했을 때 다섯 장 챙겨주신 탕웨이 공작께 이 영광을 돌린다. 13일 가량 지난 여행에 충분히 맞닥뜨릴 만한 상황이지만 화장실 환경이 여의치 않은 유럽에서는 꽤 치명적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온 영국이지만 3개국을 지나도록 그냥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주요 관광지에 들르거나 투어 가이드가 중간중간에 화장실을 권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이유다. 아무쪼록 탕웨이 공작의 업적을 기리며 중국남방항공이 더 저렴하더라도 중국동방항공을 이용할 것이라 맹세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