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2일차 3 (23.08.16)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30. 19:28
반응형

마이클 남작의 차고 넘치는 호의를 뒤로하고 런던 탑으로 향했다. 런던 탑은 말만 탑이다. 런던타워는 영국을 지키는 성채 중 하나이며 왕의 거처와 요새, 고문과 처형의 역사까지 두루 갖춘 근현대사를 품고 있다. 유서 깊은 성채답게 그 생김새도 상당히 근엄한데,  출입구를 지키는 직원의 태도까지도 다소 근엄하다. 그가 찰리 채플린같은 콧수염으로 분위기의 균형을 맞추고 있지 않았다면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사실 찰리 채플린은 귀국해서 떠오른 인물이다. 영국인에게 히틀러같다고 이야기했다가는 프랑스 주마등 패키지에 이어 잉글랜드 감옥 패키지를 체험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내 런던패스를 보더니 히트.. 아니 채플린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며 'Are you okay?'로 끝맺는다. 나 아픈 데 없는데 하고 잠시 생각하며 무의식적으로 히틀러라고 했는지 고민했으나 그러지는 않은 것 같아  'okay'라 답했다. 별 문제없이 런던패스를 찍고 들여보내는 것을 보니, 관람시간이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괜찮냐는 이야기가 분명했다. 사실 영어가 제2의 모국어일 만큼 어학 능력이 출중했다면 무의식이 앞서 감옥 패키지가 더 가까웠을 확률이 높다. 런던패스는 쓰지도 못하고 런던을 패스하는 것이다.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괜찮겠냐고 물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곳의 역사를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 골격 위로 계속 살이 붙었듯 처음에 탑으로 시작해서 그 주변을 점점 넓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근엄하고 신사적인 찰리는 형광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성채 내부의 근무자들은 영국의 전통 복장을 입고 근무중이었다. 중앙을 둘러싸고 있는 성채 내부에 각종 주제의 전시가 연속되었다. 영국에서 사용했던 각종 무기, 왕의 초상화와 왕이 착용했던 갑옷, 영국의 지난 역사와 런던 탑에서 있었던 고문의 역사까지 다채로운 전시가 이어져 있었다.

역사도 역사지만 'The Crown Jewels'가 백미였다. 영국 왕실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보석 박힌 왕관이 전시되어 있는데 쉽게 보기 어려운 화려함이다. 아쉽게도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반드시 무빙워크에 올라 관람해야 하며 멈춰서 왕관을 관람하는 것도 금지라 얼마나 보안이 삼엄한지 알 만 하다. 역사 전반에 관심을 갖고 찬찬히 둘러보기에 1시간은 확실히 무리가 있다. 현대 영국의 전쟁사를 전시해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흉상도 있다. 한국전쟁까지도 전시에 포함되어 있어 꽤 현대의 일까지 다루고 있으니, 채플린이 검표원으로 장기근속한다면 그 흉상까지 만들어볼 법 하다.

런던탑에서 나와 타워브릿지까지 바삐 걸었는데 입장 마감이 12분 가량 지나 있어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이라면 무엇에 쫓기는 것이 가장 무서울까? 경시청 자베르도 훌륭한 답변이지만 시간에 쫓기는 것이 가장 무섭다. 시간에 쫓기기에 둘러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쫓기듯 타워브릿지의 외관까지 보고 나서야 목마름이 밀려왔다. 런던탑을 모두 보고 타워브릿지를 건너 버스 정거장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노점에서 뭐라도 사 마시려 줄을 섰는데 앞에 선 몇몇이 든 것도 없이 대열을 이탈하는 게 아닌가.

맛있는 게 없나 생각하는 순간 번개같은 생각이 스쳤다. '아 여기는 현금만 되나보다' 파리를 떠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가르침을 잠시 잊었다. 그조차도 6유로부터는 카드 받아줬었는데... 자코뱅이 잉글랜드에서는 온건파일지도 모른다. 정류장까지 거의 다 가서야 카드 되는 작은 마트가 나왔다. 희한한 것은 불닭볶음면 시리즈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라, 오랜만에 본 불닭볶음탕면이 반가웠다. 물과 자그마한 아이스크림콘까지 더하니 금방 10파운드가 넘어간다. 이 정도 물가면 런던 탑에서 운 좋게 탈옥하더라도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다. 물가가 정말 런던Top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