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3일차 3 (23.08.17)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9. 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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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탄 버스는 'hop-on-hop bus' 였다. 파란 외관에 2층 뒷부분이 트여 있어 빨간 2층 시내버스와 확실히 구별되었다. 투어 버스에 대한 사전 정보는 따로 찾지 않았다. 버스를 탈지 타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하루 동안 무제한 탈수 있다고 하니 그냥 그런가보다~ 최대한 아침 일찍 타면 좋겠다~ 정도 생각했을 뿐이다. 이런 수준의 예민함은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언제든 고기를 가져올수 있으니 굳이 접시에 가득 담아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나는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이 담는 편이지만, 그런고로 굳이 세부사항까지 찾지 않고 갑작스레 버킹엄 궁전 앞에서 투어버스를 잡아탄 것이다.

 

그런데 대략 30여 분이 지나자 분명 아까 본 풍경이 또 보였다. 다음 정류장이 버킹엄 궁전이란다. 2~30분에 한바퀴를 다 돌 만큼 런던이 작지 않을텐데 싶어 1층으로 내려가 버스에 비치된 가이드북이 있는지 살폈다. 투어상품 소개와 함께 노선도가 있어 살펴보니, 내가 탄 투어버스의 운행구간이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 핵심이었다. 예컨대 투어버스의 정류장이 1~10까지 있다면 이 버스는 3~5 구간만 다닐 뿐 1~10을 모두 순환하는 노선이 아닌 것이다. 이게 무슨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샐러드만 먹는 소리인지 당황스러웠다.

 

다른 구간의 투어버스를 타려면 내리고, 기다리고, 버스 기사님께 묻기를 반복해야 했는데 그런 소요시간을 감안하고 버스를 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탄 버스가 버킹엄 궁전을 거쳐 트라팔가 광장, 빅벤, 런던아이, 타워브릿지, 세인트 폴 대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모두 지난다는 것이었다. 무한리필 고깃집에서 정해진 메뉴만 먹을 수 있다기에 짜증냈으나 정해진 메뉴가 꽃등심인 격이다. 꽃등심에 만족하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착석했다. 2층에 서서 가끔 힘주어 버티며 주변 풍경과 각종 랜드마크를 찍는 데 열중했다.

 

빅벤을 열심히 찍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팔꿈치에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싶어 쳐다보니 갑자기 동그란 빛이 번쩍한다. '아니 애틀랜타 지부장님이 여기까지 오셨을 리는...'까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없어서 빠르게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는 방금 런던 투어버스에서 노신사의 머리에 엘보우를 갈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앞만 쳐다볼 정도로 런던의 경치가 좋지는 않았는데 뒤조차 돌아보지 않아 내가 눈채치는 속도가 늦은 것이다.

 

신속한 사과에 이어 혹시 화를 낸다면 황급한 무릎까지 고려하였으나 'Nevermind'로 넘어갔다. 동방예의지국의 청년이 순식간에 뻐킹옐로몽키가 될 만한 상황에서 노신사의 관용에 기댔다. 그저 관광객이셨다면 어느 도시의 지부장인지 알아 두었어야 다음 해외여행을 그리로 갈 텐데, 아직 중국동방항공을 타겠다는 것밖에 정해진 게 없다. 물론 노신사 옆의 아내분께서는 내게 눈빛으로 'Good boy'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여행지에서는 싸우기 일쑤라더니 두 분께서도 거나하게 한 판 하셨음이 틀림없다.

 

뚜껑이 없는 버스에서 남의 뚜껑을 갈기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후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저녁 햇살에 도시가 밝게 빛나 구경하기에는 좋았으나 뚜껑이 없는 버스라 슬슬 추웠다. 바람때문에 팔의 감각이 조금씩 무뎌졌다. 모든 장소를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이걸로 대충 내일 일정을 정할 수 있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우선순위로 두고, 혹시 시간이 남으면 그리니치 천문대까지 가기로 했다. 토트넘 식당 이후로 먹은 것이 없어 급격히 배가 고팠다. 숙소 근처로 가며 배 채울 궁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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