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8일차 5 (23.08.22)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11. 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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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시력을 필요로 한다

 

간단히 요기하고 기다리니 전광판에 게이트가 떴다. B35라니 딱 봐도 너무 멀다. 잉글랜드의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내딛어도 족히 20분은 걸릴 만한 거리라 잰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했다. 엘리베이터 타고 무빙워크 타고 걷고 또 걸어서 무리 없이 탔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깔린 하늘을 보며 창가에 앉으니 돌아간다는 게 실감났다. 이처럼 그냥 은연중에 스윽 찾아오는 게 한둘이 아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군생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사무실, 돌아가지 않을 것 같던 해외여행 등등 그냥 시간이 사람을 그리로 스윽 데려간다. 타임라인 어딘가에 원형탈모도 끼어 있을 것이다. 접하는 기간이 얼마든 떠나는 것은 묘한 느낌을 남긴다. '안녕'히계세요 라는 것이 일상적인 말이 아니었다면 약간의 울렁거림이 더 있을 테다.

 

마지막으로 여행한 나라가 영국이냐고? 아니, 사요나라다.

 

어둑어둑한 때에 떠서 어둑어둑한 때에 도착한다. 시차를 포함하여 23일 오후 4시 30분경 인천에 내린다. 12시간 30여 분의 비행이 예정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옆자리 승객이 멀쩡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이내 일본으로 가는 체구가 큰 왕코형님 두 분이 내 옆에 연이어 앉았고 다행히 그리 특이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두 왕코가 잠을 자기 시작하면 나는 결코 화장실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로마에서도, 피렌체에서도, 파리에서도, 런던에서도 무탈히 지나온 마당에 상공에서 지릴 수는 없기에, 그들이 의식이 있을 때 잽싸게 화장실부터 다녀와 항로를 탐색했다.

 

러시아 영공은 안 지나가면 안 될까요?

 

경로가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직관적인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프리고진 급은 아니니까 크게 신경쓸 일은 없을 것이었다. 물론 나 말고도 그런 급이 비행기에 타고 있다면 심히 위험해진다. 나날이 발전해온 인류의 군사기술은 내가 생의 마지막에서 스튜어디스님께 고백할 겨를조차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내 엔진 출력이 올라가는 소리가 나며 이륙이 가까워졌다. 활주로에서 기체가 뜨며 조금씩 펼쳐지는 야경은 언제 보아도 장관이다. 이 위로 오르고 올라 우주 멀리 가면 보이저가 찍은 창백한 푸른 점이 되겠다만, 지금은 찬란한 밝은 점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모양이다.

 

야경부장관

 

 

일회용 슬리퍼와 간단한 개별 세면도구, 담요를 받아두고 잠시 있으니 기내식이 나왔다. 물티슈로 나를 여러 차례 구해준 중국동방항공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나 기내식에 입맛이 더 당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니 중국이 아시아에 속해있는 것이다. 무사귀국을 기념 겸 축원하며 처음으로 기내에서 와인을 함께해보았다. 옆자리의 왕코형님들은 신들린 듯 맥주를 해치웠고, 카스를 계속 비워내며 계속해서 스튜어디스에게 맥주를 더 달라고 요청했다. 혹시라도 취해서 스튜어디스에게 진상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내가 멋지게 나서서 손주 이름을 지을 기회가 올 수도 있었다.

 

물론 실상은 1대1도 어려운 거대한 왕코형님 둘에게 간단히 제압당할 가능성이 높고 손주는 개뿔 상조를 알아봐야 할 것이 분명했다. 제지한답시고 몸이라도 잡는 순간에 왕코형이 테이저건이라도 맞으면 코도 작은데 억울하게 함께 지져질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낯빛만 살짝 변한 채 몸을 파묻고 잠을 청했다. 위스키로 단련되신 것이 분명했다. 이륙 전에 격리당할 위험을 감지하고 미리 화장실을 다녀왔으나,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셨더니 또 살살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좀 비집고 나가볼까 싶기도 했는데 발을 잘못 딛으면 다시 상조를 알아봐야 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 기내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왕코형님들이 미친듯 비워댄 카스가 그들을 먼저 일으키며 상황을 자연스레 해결해주었다. 카스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카스의 용도가 아닌 것 같다. 다시 격리당하기 전에 잽싸게 나가서 먼저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내 좌석만 격리되어 있었다. 다행히 왕코형이 잠들기 전이라 excuse me로 해결이 가능했다. 씨익 웃으며 일어나는데 어둠 속에서도 또렷한 이목구비가 잠시 보여 불가능한 손주를 잠시 상상하게 한다. 미의 기준이 서구권에 맞추어진 것이 연이어 증명되는 와중에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종종 밖을 보고 싶어 창문을 올렸는데 눈에 손상을 줄 만큼 밝은 빛이 쏟아져들어와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간 초점으로는 맛을 가리지 못한다

 

바깥 풍경을 보기도 어려웠을뿐더러, 보더라도 어슴푸레한 지평선이나 흩뿌려진 구름조각들이 전부였다. 기내식 먹고 조금 뻗어 자니 어느새 도착해있었다. 살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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