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8일차 1 (23.08.22)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10. 2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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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뽀시락대는 소리에 뭔가 하고 보았는데 어떤 작은 체구의 동양인 여성분이 30인치에 육박하는 캐리어를 꾸리는 소리였다. 나만 체크아웃인 게 아닌 모양이다. 짐의 구성이나 쓰여진 글자를 보아하니 중국 분 같았다. 곤히 잠들어있는 양꿍이에게는 괜히 혼자 정이 들어 배 위에 감자칩이라도 하나 올려 주고 나올까 싶었지만 딱히 가진 게 없었다. 1층 데스크에 문의하니 짐 보관이 유료라 조금 불편하더라도 캐리어를 갖고 나가기로 했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짐을 무료로 맡길 수 있다고 했다. 버스로 테이트 모던 근처에서 내려 조금 걷기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세탁물을 싣는 트럭이 줄지어 서있었다.

 

호스텔이 주 고객인 듯 하다

 

테이트 모던도 식후경이라 샌드위치에 커피를 먼저 충전하기로 했다. 맨날 테스코만 갔었기에, 마지막 날을 기념하여 바로 옆에 있는 PRET에 가기로 했다. 샌드위치 하나에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하루 시작이 퍽 좋다고 생각하던 참에 창가의 한국인 커플이 너무나도 오붓하게 꽁냥대며 애정행각을 하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런던 법을 따라야 하니 공공장소에서 저래도 괜찮은지 약간 의문이 들었다. 동방예의지국의 고독한 대식가 입장에서는 FUCK 좋은 시작일 뿐이었다. 별개로 연어샌드위치와 커피 맛은 훌륭했다. 마지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러셀 스퀘어를 떠났다. 

 

한국에서는 연어샌드위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마이클에게도 테이트 모던을 보고 있겠다고 알리고 버스를 탔다. 한국처럼 버스가 저렴하진 않다. 한국에서 후불교통카드로 막 찍고 다니던 버릇에 길들여진 채 영국에 온다면, 버스 2층에 앉는 전망 비용이 별도로 청구되는지 의심하게 될 확률이 높다. 나는 런던 8일차라 어느 정도 당연히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지에 이르렀다고 써도 무방할 것 같다. 며칠 전, 나도 모르게 런던 신사께 불시에 갈겨버린 엘보우로 인해 평균 교통비가 급상승할 위험이 있었으나 무사히 지나왔기에 이번 버스 이용만 무사히 지나보내면 될 일이었다. 

 

버스 안에서 공항 가는 길을 조금 자세히 찾아보았다. 끝이 좋아야 모두 좋은 것인데 예기치 못한 일로 비행기를 놓친다면 다시 양꿍이에게 감자칩을 전달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넉넉히 도착하여 공항 내부도 구경하고 면세점도 둘러보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할 것이었다. 히드로 공항까지는 지하철을 이용하거나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탈 수 있었다. 20시 40분 비행기였으므로 런던 도심에서 오후 3~4시 경에 출발한다면, 다시 누군가에게 엘보우를 갈기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별 일 없이 탑승할 것이었다. 뭉게뭉게 낀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테이트모던 가는 길
WELCOME TO TATE MODERN

 

테이트 모던은 옛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건물이다. 도시재생의 훌륭한 사례 중 하나여서 전에 도시재생과 복합문화공간 조성의 사례 중 하나로 조사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실제로 와 볼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는 그냥 이렇게 전시 보러 다니는 것이 내 문화적 소양의 폭이 좁아서인가 싶기도 하다. 관심을 두거나 즐길 줄 아는 영역이 그리 많진 않은데 마침 무료 전시가 있으니 보는 정도, 딱히 심미안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듯 한데 작품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게 재미있긴 하다. 쩝쩝박사가 아니더라도 일류 요리사의 음식을 먹으면 맛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과 조금 유사하다.

 

어느 곳에서든 하는 짐 검사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캐리어의 굴레에서 나를 구원해줄 짐 보관소를 먼저 찾았다. 규모가 꽤 컸는데, 캐리어는 그냥 보관소 한쪽 구석에 세워두고 그 숫자에 맞는 토큰을 받는 구조였다. 양 손이 자유로워지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구원이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천국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천국 런던지부는 테이트 모던에 있다. 마이클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11시, 짐을 맡기고 나니 10시 조금 전이라, 한 시간 조금 넘는 정도의 관람시간이 남아 있었다. 말 그대로 주요 작품 위주로 쓰윽 둘러볼 정도의 시간이었다. 

 

천국 런던지부 전경

 

당시에는 '나중에 여자친구와 여유 있게 오면 되지~'라고 마음을 토닥였지만 나중과 여자친구와 나중의 여유와 여자친구의 여유와 나중의 돈과 여자친구의 돈이 전부 있을 가능성을 검토하니 조금 우울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게 다 갖추어져야 아침에 본 이들처럼 FUCK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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