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 아래 가벼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가로운 런던의 오후를 느끼며 James Smith & Sons로 향했다. 출국 전부터 방문을 부탁받은 장소여서 일찍 가볼 법도 했으나, 귀국을 앞두고야 가게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어느 대학에서는 하계 학위수여식이 열렸는지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슬리데린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한 40분 설렁설렁 걸었다. 오래 걷기에는 캐리어가 꽤 거추장스러웠으나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1830년에 설립된 전통 있는 곳으로 우산 손잡이 조각이 멋지고 독특하게 디자인된 것이 특색이다.
특색 있는 우산은 주로 웹사이트 이미지에 있었는데, 가게 안에는 그러한 우산이나 지팡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인터넷으로 주문제작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 싶었다. 다만, 실제로 진열된 우산을 들어보는 순간 특유의 둔중한 느낌과 함께 우산의 내구도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킹스맨에서 T발 Colin Firth 형님의 우산이 저렇게 튼튼하다고? 라며 문제를 제기하는 극현실주의자가 있다면 그러한 의문을 T없이 해소해줄 수 있는 가게이다. 그냥 진열된 것도 가격이 수십만 원이다. 어느 뒷공간에 실제로 킹스맨 런던지부가 있을법 하다.
귀국이 아쉽지만 일찌감치 공항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피카딜리 라인 말고도 얼마 전 신설된 엘리자베스 라인으로 히드로 공항까지 갈 수 있는데, 패딩턴역의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이용하여 15~20분만에 갈 수도 있었다. 대강 공항철도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패딩턴에서 내렸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별도의 티켓이 필요했다. 당황하지 않고 발권기로 가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찾아보니 25~37파운드였다. 당황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엘리자베스라인으로 내려갔다. 신혼여행도 아닌데 감히 25파운드짜리 공항철도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12파운드 남짓의 킹리갓베스 라인으로 공항에 도착하여 터미널까지 걷고 또 걷기를 15~20분가량, 일찍 도착해서 면세점이나 구경하고 배 채우면 되겠지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걸어나온 곳이 이미 2층이라 조망이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온라인으로 셀프체크인도 마쳤기에 면세점이 메인이었다. 술 코너 구경이나 좀 하고 100파운드 내에서 선물용과 기념용 위스키 정도 고를 생각이었다. 턱시도를 갖춰 입고 나비넥타이를 맨 직원이 미소지으며 다가오더니, 방금 전에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포기한 사람에게 무엄하게도 400파운드짜리 위스키를 추천했다. 27넬슨을 권하는 걸 보면 돈 많은 중국인쯤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괜찮다고 하였는데 뒤따라오며 300파운드, 270파운드의 술을 연이어 추천했다. 종종 도믿맨에게 잡히는 입장으로서 '위스키를 아십니까?'는 조금 신선한 종목이기는 하다. 조금 둘러보겠다고 이야기한 후 이달의 불친절 사원을 뒤로하고 한참 구경했다. 히드로동대문세계주류매장에서 최종적으로는 글렌드로낙 10년산과 봄베이 사파이어 선셋을 골랐다. 후자는 한정판 과일향에 병이 예뻐서 골랐기에 실제로 가격이 싼지 아닌지 감도 제대로 오지 않는다만, 합쳐서 77파운드가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 만찬을 좀 즐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비행기에서도 기내식이 나올 것이기에 잠시 앉아 허기만 면하기로 생각하고 샌드위치와 에너지드링크를 샀다. 탑승 게이트가 아직 나오지 않아 핸드폰을 충전하며 기다리려는데, USB 케이블을 꽂는 대부분의 포트가 망가져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분실한 것이 멀티플러그라 잠시 방황하다 그냥 보조배터리를 쓰기로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무탈한 여정이지 않나, 역시 예상보다는 운이 없지만 생각보다는 운이 좋다.
'探: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U레카] Epilogue (0) | 2023.11.07 |
---|---|
[EU레카]런던 8일차 5 (23.08.22) (1) | 2023.11.07 |
[EU레카]런던 8일차 3 (23.08.22) (2) | 2023.10.30 |
[EU레카]런던 8일차 2 (23.08.22) (2) | 2023.10.23 |
[EU레카]런던 8일차 1 (23.08.22) (2) | 2023.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