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런던 4일차 1 (23.08.18)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9. 1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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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여유가 되면 그리니치 천문대까지 가기로 야심차게 계획한 날이다. 숙소에서 조금 걸어 지하철역으로 간 후 세인트 폴 역에서 하차할 생각이었는데,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그러거나 말거나 어떤 가게에서는 엽서류가 가득한 거치대를 입구에 그대로 두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닥이 흥건할 정도라 보는 사람이 불안했다. 단순히 잊은 것인지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아르바이트생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유럽의 여유는 마음 급한 조선인을 고문하는 신종 기법과 가까이 있다. 

가게 주인에게 알려주고 몇 장 얻어올걸 그랬다

 

빗물이 채색한 성당 외관은 다소 을씨년스럽기도 했다. 외부를 먼저 한바퀴 돌아보며 전경을 감상하고 입장.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먼저 본 데다 피렌체의 성당까지 거쳐 온 까닭에 이제는 감흥이 크지 않다. 산해진미 코스요리를 먹을 기회가 생겼는데 메인요리를 가장 먼저 맛보고 이미 배부른 상황에서 다른 요리를 맛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성당 내부가 역사적이지 않거나 웅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두리번거리며 내부로 들어섰다. 그런데 세인트 폴 대성당은 내가 갔던 다른 성당들과 달리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고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영국 관광청

 

예기치 못한 국격에 전혀 뜻밖의 곳에서 가슴이 웅장해진 후 실내를 둘러보았다. 영국의 역사와 정신이 담긴 공간답게 유서 깊고 성스러운 분위기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화려함과 찬란함으로 사람을 압도한다면 이곳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종교가 갖는 특유의 준엄한 기운이 와 닿는다. 학창시절, 회초리는 들고 다니지 않지만 자극하면 안 될것 같은 스승님을 한 번쯤 겪으셨을 것이다. 비슷한 기운이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의 족적을 담고 있는 성당이며 일반 민중들과 오랜 세월 함께한 성당이라고 들었는데 영국인의 정신적 뿌리에 박힌 건축물로 느껴진다. 한국으로 치면 남대문 비슷한 상징성이 있는 듯.

그렇다고 화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역사보다 마음이 간 것은 런던 대화재 이후 성당을 무려 35년간 복원한 크리스토퍼 렌 경의 이야기이다. 말이 간단하여 35년이지 내 나이보다 많다. 응애에서 고등교육 수료 이후 직장을 수 차례 옮겨다니는 현대의 기준으로 35년은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다. 여생을 세인트 폴 성당 복원에 바쳤다고 해도 무방한데, 그러한 사명과 소명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설령 출세를 향한 세속적인 열망이라고 쳐도 하느님께서 보셨다면  '야... 이 정도면 그냥 출세시켜 줘라' 하셨을 법 하다. 늘 멋진 밥을 먹고 싶어서 메뉴 하나 고르는데도 좌고우면을 거듭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결단이다.

 

지하에는 웰링턴 장군과 넬슨 제독의 관이 있다. 영국에 두유노클럽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갈 만한 위인들인 만큼 거대한 석관이 놓여져 있었고, 근처를 지나는 영국인들이 종종 기도하거나 묵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쁠레옹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지금의 영국이 없었을 것이니 국가적으로 기념할 만 하다. 남은 것은 돔 전망대 뿐이라 계단을 오르기 전 가장 먼저 화장실부터 찾았다. 중국동방항공의 은혜도 모두 떨어진 마당에 돔에 오르다 긴급상황이 발생한다면, 지하의 장군과 제독에게 나도 막아낼 수 있게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기도를 올리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

 

전망대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이 계속되었다. 거의 도착할 무렵에 만난 철제 계단이 좁은 것은 전에 가 보았던 전망대와 마찬가지였다. 바티칸과 피렌체의 경력을 살려 끝없이 돌며 올라갔다. 화장실에 미리 들른 것은 8월에 내가 했던 가장 훌륭한 판단 중 하나다. 날은 흐리지만 런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돔을 둘러 가며 시내 구석구석을 훑었다. 런던 대화재 기념비와 런던아이 등 여러 관광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 샤드 전망대에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정말 뜬금없이 배에 신호가 왔다. 아랫배가 아니라 윗배다. 여름이었다점심때였다.

저런 계단에서 아랫배에 신호가 왔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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