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국 비행기 A330의 내 좌석 USB포트가 고장이었다. 이야기하니 자리를 옮겨 준단다. 그런데 옮긴 자리가 승무원석과 마주하고 있는 자리였다.(실제로 여기에도 앉을 만큼 많은 스탭이 탑승했는지는 모른다) 비상 탈출구 바로 옆이라는 것은 비상시에 할 일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어지간하면 나는 무탈하게 다시 막국수 앞으로 돌아가고 싶다. 장시간 좁은 좌석에 앉음으로 인해 피가 굳어 생기는 이코노미 증후군과는 작별해도 좋을 만한 자리이다. 뜻밖에 일코노미에 탑승하다니.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빽빽이다. 장거리 비행에도 대강 창가 자리에 앉게 된다면 창문 가리개를 열어 풍광을 감상하려 했다. 그러나 운항 중 대부분의 창문이 닫힌 가운데 좌석 위의 작은 등이 전부였다. 잠깐 열면 안되나 싶어 창문 가리개를 반쯤 올렸는데 대략 5개국의 다인종이 목베개를 한 채 지탄의 눈길을 보내왔다. 무탈히 다시 막국수 앞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잽싸게 가리개를 내렸다.
안 그래도 긴 비행시간이 거의 두어 시간 늦어진 까닭에 도착시간이 밤 9시 21분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물론 시차 때문이고 실제 비행시간은 10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나름 꿀잠을 좀 잤다고 여겨 꽤 많이 왔겠지 하고 비행기 위치를 보니 몽골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아니.. 말을 타고 고려까지 오셨다구요? 아무튼, 연착으로 먼저 먹은 기내식 다음으로 종이봉투에 간식꾸러미가 나왔다. 남녀노소가 두루 즐길 수 있어야 했는지, 대추과자와 카스테라와 비스킷이 동승하고 있었다.
자리를 옮긴 탓에 뒷자리에 앉았던 서방예의지국 부부와도 떨어지게 되었다. 체구만 보면 그들이 일코노미에 앉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쨌거나 짝 있는 사람들은 걱정하는 거 아니다. 저녁 기내식이 내심 궁금해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장거리 비행을 대부분 사육이라 표현하던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시간이었다. 연착 도중 만난 기내식의 종류를 묻는 때는 별 생각 없이 Rice라 했는데 저녁에도 선택권이 있다면 Noodle 한번 외쳐 볼 생각이다.
창가 자리여서 그런 것도 있겠으나 공기가 기체를 스쳐가는 소리가 꽤 커서 이어폰을 착용해야 그나마 조금 더 편안히 갈 수 있었다. 장거리 비행에 대비해 음악을 오프라인 파일로 200곡 가량 추려 넣어두었다. 단순히 3분이라 치면 그럭저럭 10시간은 때울 수 있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때워야 할 시간의 구멍이 생각보다 컸다. 늘 데이터가 되는 곳에만 있다 보니 넷플릭스에서 오프라인 다운로드를 하는 등의 생각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 때는 출국 전에 런던패스를 몇 일로 할지가 더 중요했다.
디스플레이에 여러 메뉴가 있길래 별 생각없이 MOVIE를 골랐다. 중국어 대사에 영어 자막이 좋을지 영어 대사에 중국어 자막이 좋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는데 여차저차 후자를 골랐다. 채닝 테이텀과 산드라 블록,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나오는 'The Lost City'였나.. 대강 봐가며 두어 시간을 보냈다. 한글로 제목이 어떻게 번역되었을지 약한 짐작을 하는 가운데 영화가 망했을 것 같다는 강한 짐작이 함께 들었다. 비행기 자체의 와이파이가 있기는 한데 추가요금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렇게 비행하고 다 빈치 공항에 내려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타고 테르미니 역을 거쳐 숙소인 호스텔 모자이크까지 도보 이동하는 게 계획대로 착착 되려나 약간의 걱정이 든다. 연착으로 인해 도착시간이 늦어져 기차가 끊겨 있다든지 등 불확실성이 급격히 높아졌다. 뭔가 해결하려면 당연히 시간과 돈과 체력이 들 텐데, 내일의 로마 시내투어가 아침 9시부터라 장거리 비행 중에 변수와 행동을 조금씩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쓰는 와중에 바로 옆의 일코노미석에 앉은 커플이 잠에서 깨더니, 남자가 여자의 종아리를 주무르며 마사지한다. 너네는 항공료 두 배로 내라. 항공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나는 슬슬 저녁이 기다려졌다. 물론 오래 앉아있다 보니 배보다는 허리가 더 난리다. 퇴사가 결정되자마자 유럽행을 조금 미리 계획하고 생각하고 예약했으면 여행의 질이 조금 높아졌을까. 알 수 없는 가운데 [EU레카]라고 써 두었지만 정작 [EU]에는 아직 진입도 못 했다. 여행 2일차에 청도와 상해 공항투어를 했을 뿐이다. 과연 무사히 로마에 체크인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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