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푸동공항 경유기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5. 15:11
반응형

곧 이륙이겠거니 하고 방심하던 찰나에 'Thank you for your patiently'가 들린다. 내 영어는 방금 쓴 스펠링이 맞는지도 헷갈릴 정도로 처참하지만, 한국인은 불가피하게 맥락을 읽는 능력이 길러진다. 세간에서는 흔히 눈치라고 하는데 이미 사람들이 탄 마당에 내 인내심에 감사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래서 대충 키보드를 꺼낸 것이다. 밀리고 밀려 오밤중에 로마의 테르미니 역을 배회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리 따지면 일은 뭐 관두고 싶어 관뒀던가. 2017년 이후 6년만에 다시 찾은 푸동공항은 여전하긴 개뿔 2017년의 푸동공항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겁-----나 크다.

다음 비행기까지는 서너시간이 남았다.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고기국수로 대강 해장하고 바로 옆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까지 야무지게 소화한다. 로컬 맛집 찾아다니는 것이라면 언어가 좀 되어야 하겠지만, 이미 그림으로 메뉴가 나와있는 공항에서야 뭐, 다만 빨간 배경에 '반드시 필'자가 써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뜨거운 거밖에 안 된다는 거겠지 뭐 별거일까. 덕분에 트래블월렛 카드를 처음으로 개시했다. 원화로 충전한 외화가 결제하는 즉시 빠져나가는데, 필요한 만큼만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으니 분실 대처에 탁월할 듯 하다. 다 먹고 탑승구를 찾아가는데도 여전히 크다

땅이 크고 물건이 많다고 해서 중국을 지대물박이라고들 하는데 사람 많은 것에 비하면 땅덩이나 물건은 뒤로 밀리는 것 같다. 세가지가 많아서 삼다도인 곳도 있는데 여기는 왜 삼다륙이라고 부르지 않나. 자오둥공항에서도 새벽 5-6시인데 체크인 줄이 길게 늘어섰고 푸동에 내려서도 다국적 세계시민들이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게이트 숫자가 이미 300번대였는데,  로마행 티켓에 적힌 게이트는 16번이었다.(파파고만 섬기지 말고 주님도 섬겼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항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이 정도로 China는 번호는 인천공항과 같이 열차를 이용해서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아무 직원이나 붙잡고 티켓을 보여주며 대충 모르겠다는 이목구비를 보여주면 된다. 잘생긴 이목구비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그냥 이목구비로 가능하다면 어렵지 않다. 16번 게이트 앞에 곧바로 자리를 잡으려니 수많은 파스타 형님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대강 낑겨 앉아있다가 탑승구가 열리는 11시 45분에 오픈런, 기왕이면 창가이길 원했는데 창가 바로 옆이었다.

창가 자리에는 국적을 알 수 없지만 영어를 쓰는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앉았는데, 승무원에게도 영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홍콩인으로 추정된다. 뒷좌석에는 커플 사이에 끊임없는 영어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남성이 내 뒷자리였다. 무릎이 내 좌석에 닿을 정도의 거구였다. 뒷좌석을 눕혀도 당신의 자리가 충분합니까?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늘 그렇듯 능력이 다소 부족한 탓에 일단 자리부터 눕히고, 'Your space is okay?'라고 물었다. No면 No인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괜찮았을 뿐만 아니라 물어봐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동방예의지국의 맛이 어떠냐)

글머리의 방송이 한번 더 들리자마자 기내식이 깔리기 시작한다. 인내심을 요구하려면 먹이를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지, 그냥 밥 때가 되어서 주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중국식의 돼지고기덮밥은 그럭저럭이다. 애초 기내식이 맛있으리라는 기대가 없어서인지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잽싸게 해치웠다. 그러는 와중에 12시 30분 출발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2시가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대각선 어딘가에서 짜증스러워하는 모국어가 들린다. 대부분의 한국어는 절반 가까이가 짜증스러워하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입국심사 때도 길게 늘어선 줄에 아랑곳않고 심사 게이트의 문이 절반도 열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바꾸어 말하면 그 정도의 줄은 그들에게 길게 늘어선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한국인 관리자가 있었다면 즉각 다른 게이트를 개방하여 병목현상을 해결할 만한 부분이랄까. 연착이 어떤 사유로 발생하는지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는데 굳이 물어보고픈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고오급-항공사의 직항편을 골랐다면 조금 짜증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짐을 들고 타는 캐낭여행에서야 뭐. 어제 청도에 내렸을 때 보았던 잘생긴 청년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구라파 어딘가를 떠돌고 있으리라.

반응형

'探: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U레카]로마 1일차 (23.08.05)  (1) 2023.08.09
[EU레카]장거리 비행 2  (0) 2023.08.06
[EU레카]장거리 비행 1  (0) 2023.08.06
[EU레카]자오둥공항 체류기 2  (0) 2023.08.05
[EU레카]자오둥공항 체류기 1  (0) 2023.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