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파리 5일차 3 (23.08.14)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2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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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그처럼 멋진 저녁식사의 상세한 전말을 쓰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하다. 따로 정산하지 않은 게 아무래도 제우스님의 독단적인 덕행(?) 같은데 혹시라도 글이 후에 검색당하여 제우스님께 헤라의 후환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되도록 연옥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입장이라 염려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받은 것도 크기에 귀국하고라도 한 번은 소소한 성의와 함께 따로 인사를 전함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나 이후의 여정들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무수한 보살핌 속에서 살아간다.

어쨌거나, 제우스님이 우버로 부른 차량을 타고 유람선 선착장까지 이동했다. 헤라님께서는 전에 가족들과 파리에 온 경험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때보다 유람선의 인기가 월등히 높아진 모양이었다. 줄을 서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바로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기에 혹시 제가 디저트를 진상해도 되겠는지 여쭸고, 제우스님만 아이스크림을 드셨다.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장할 수 있었는데, 유람선 2층으로 올라가 가장자리에 늘어섰다.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탑승하기에도 훌륭한 타이밍이었다. 조명이 켜진 에펠탑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주고받았다.

유람선 탑승객들은 배가 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함성과 환호성을 연신 질러대거나, 다리 위의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연출된 것인지는 모르나 어떤 외국 영상에서 'May I kiss you?'라며 뜬금없이 입 맞추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연히 일반적이지 않으니 그러한 영상이 촬영된 것이겠지만 이러한 분위기라면 그 영상과 같은 상황도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싶었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지만 혼자 온 것도 아닌 마당에, 괜히 섣부르게 시도했다가는 외교부의 프랑스 주재원과 안면을 트게 될 것이 분명했다.

강 위에서 붉게 물들어 가는 파리의 저녁을 보는 것은 몽파르나스 타워의 야경과는 색다른 맛이 있다. 제우스님조차도 모든 일정을 통틀어 유람선이 가장 만족스럽다는 평을 남겼다. 카메라로는 빛 번짐을 잡기 어려워 그 광경을 다 담아내기 힘들었음에도 사진을 꽤 열심히 찍었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뭐든 남아있지 않다면 다녀왔음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것이었다. 유람선은 대략 한 시간 가량 운행하는데 탑승권의 가격을 환산하니 8~9천원 남짓에 불과하다. 미슐랭에서 인증 간판을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

유람선을 타자마자 배의 2층 왼쪽 난간 근처에 자리하는 것이 처음 에펠탑을 보기에는 가장 좋다. 배는 한 편의 끝에서 선회하고 또다시 반대편의 끝에서 선회한다. 즉 야경을 가까이 두고 보기 위해서는 일어선 상태에서 자리를 두 차례는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유람선의 선회는 어떤 다리를 지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어두운 다리 밑을 통과하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바로 그 타이밍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다리 밑이 어두워지는 순간 야음을 틈타 배의 반대편으로 재빠르게 침투한다. 유람선의 한국인들은 유람선이 움직이는 내내 가장 가까이서 파리의 야경을 본다.

운행이 끝나갈 무렵 소나기가 쏟아져 재빠르게 1층으로 이동해야 했다. 홀딱 젖은 것은 아니라 에피소드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유람선 퇴장은 중간과 선두에 있는 두 문으로 동시에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비를 피하다 선체 중간으로 나가기 위해 줄을 서는 한편,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중간에만 늘어서 있는 줄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선두의 문으로 향한다. 국적 판별기가 오작동할 일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개선문의 그들은 나를 왕 서방으로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파리의 마지막 밤이 다소 아쉬워 로베스피에르의 구멍가게에 들르니 전례없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코뱅 당에 가입되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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