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 투어 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시간에 눈을 떴지만, 역시 투어가 딱히 당기지는 않았다. 게다가 뮤지엄패스가 아직 하루 남아있었고, 시간이 되면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 보라던 가이드님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패스를 조금이라도 더 활용하려고 4일 내내 온갖 장소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미 패스로 퐁피두, 오르셰, 루브르, 베르사유를 입장하긴 했지만 4일권짜리 패스 가격이 네 곳의 입장료를 개별적으로 내는 것보다 아마 비쌌을 것이다. 개별적으로 생각하거나 계획을 짤 시간과 여유가 많지 않으니 돈을 조금 더 내는 것으로 때운 셈이다.
'거 계획이 뭐요?'-'돈이요'.'아니 그러니까 대안이나 대책은 있어야지 않겠소?'-'더 많은 돈이요'정도를 반복한 셈이다. 곳간 탕진으로 망한 프랑스의 전철을 프랑스에서 밟는 것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투어 불참이 환불 불가로 이어진다고는 하나 참여 여부를 알리는 정도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좋다. 다만 불참을 알리고 나니 갑자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가야만 할 이유가 없어져서 그런 것이리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씻고 오랑주리 근처에 갈 준비를 하니 이미 점심시간이 조금 넘어 있었다. 여독을 풀기 위해 그냥 그 정도의 간격은 필요했던 것으로. 신선놀음 하다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비슷한 꼴이었다.
오랑주리 앞에 도착하니 다른 신선들이 긴 줄로 늘어서 있었다. 여행의 장점은 내 도끼자루가 저들의 것보다 조금 덜 썩은 게 맞는지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선~ 위 아 더 월드~ 하며 재빠르게 미국 신선의 뒤로 가 섰다. 대기열이 3분의 1쯤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무렵 뒤를 보니 내가 어느새 중간 지점에 와 있었다. 가히 신선들의 나라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는 빠르기다. 그런 중에 멀리서 오뚜기밥이 걸어왔다. 대강 손짓하며 반갑게 인사 나누었는데 오뚜기밥도 반갑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줄의 맨 뒤로 향했다. 줄이 길면 '아유 또 뵙네요 헤헤'라며 은근슬쩍 끼어들 법도 한데 말이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구름을 타고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입장까지 족히 4~50분은 걸린 것 같다. 모든 프랑스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여행하기 두어 달 전에는 예약하고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쪼록 오랑주리의 하이라이트는 모네의 '수련' 연작이기에 그 관람을 최대한 뒤로 미뤘다. 입구에서 이미 기다림 수련을 마친 마당에 하이라이트부터 보면 무슨 재미인가. 먼저 지하의 특별전과 함께 세잔, 피카소, 르누아르의 작품을 천천히 관람했다. 여기까지 가이드와 투어로 동행했다면 완벽한 미술사 어드벤처가 되었을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관람하기에는 자유관람이 조금 낫긴 하지만 말이다.
모네의 '수련'연작을 찾아 위로 올라갔다. 타원형으로 된 두 개의 커다란 방에 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수련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었다. 말년에 예술혼을 불태운 작품이라고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니 더욱 대단했다. 일렬로 늘어놓으면 100m 달리기도 가능할 것 같은 장엄함이다. 불태울 예술혼이 남다르게 많았음에 틀림없다. 예술가들의 집념이나 집요함은 불가사의하여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들이 일직선으로 걸었든 갈 지자로 걸었든 간에 삶 속에서 다른 삶을 찾아 길어올리는 과정을 온 생애 속에서 개척해 간 것이 아닌가. 시각이 멀어 가자 촉각으로 가능한 조형 작품을 도전하는 행위처럼 말이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오랑주리의 카페에 앉아 여운을 느끼며 기념품샵을 훑어보던 중 어제 베르사유 투어에서 만났던 부부에게 연락이 왔다. 괜찮으면 저녁식사도 같이할 겸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는 게 어떻냐는 제안이었다. 마침 오늘 유람선을 타야 하기에 어제 몽파르나스 타워를 다녀온 참이라 곧바로 승낙했다. '얘는 진짜 맛있는 것만 먹어'보다는 '얘가 못 먹는 건 진짜 못 먹는 거야'라는 평가와 더욱 가까운 내게, 부부와의 동행은 맛있는 반드시 맛있을 식당에 간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의 투어가 끝나는 대로 식당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잠시 남는 시간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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