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자 에릭이 또다시 맨스필드역까지 태워 주었고 역에서 에릭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1박 2일간 아무런 생각없이 쏘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킹갓마제스티엠페러 에릭 1세 덕분이었다. 에리얼은 노팅엄에서 전 직장동료를 만난다기에 노팅엄 역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창밖을 구경하며 2~30분 가량 마주앉아 이야기하니 금세 노팅엄이었다. 갑작스레 퇴직하여 유럽을 떠도는 나처럼, 에리얼도 먼 미래까지는 모르지만 현재 어떠한 삶의 분기점에 와 있는 듯 했다. 그러고보면 에리얼은 물론이고 에릭의 나이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 만나는 데 역시 나이는 큰 쓸데가 없다.
노팅엄에 도착했는데 에리얼이 앞장서다가 역 정문으로 나가는 곳을 찾지 못해 잠시 헤맸다. 플랫폼에서 곧바로 시내로 나가는 문은 있었으나, 어제 노팅엄에서 만났던 공간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구조를 보아하니 일단 플랫폼을 연결하는 계단을 모두 올라가야 했다. 에리얼이 역무원에게 다시 한 번 물어 내 생각이 맞았다고 확인해주며 내가 본인보다 낫다고 한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단언컨대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에리얼이 길을 더 잘 찾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녀의 호의와 배려 덕분에 즐겁게 돌아보고 푹 자며 재충전할 수 있었으니 여행 중 다시 없을 1박 2일이었다.
역 밖까지 슈퍼킹갓마제스티인터내셔널레전더리노블레스 에리얼 1세를 배웅하고 40여 분 남은 다음 열차를 기다렸다. 역 내의 벤치에 앉아 블루투스 키보드로 짧은 기록을 남기던 중 인도인으로 추정되는 어떤 노부부가 내게 다가왔다. 내 핸드폰은 이미 몸에 연결되어 있었고 짐이야 별 게 없으니 크게 위험할 것은 없었지만 일단 경계심을 앞세우고 그들에게 온 신경을 기울였다. 너 인도 쌀로 점심 먹었지? 정도의 신통력이 아니라면 딱히 놀랄 일은 없을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음성통화가 원활히 연결되지 않는다며 와이파이에 대해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주제 중 하나인 와이파이라니, 역시 늙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흘끗 보니 나조차도 너끈히 들어갈 만한 캐리어를 두 개 갖고 있었다. 나를 캐리어에 넣으려는 희박한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아 역 와이파이를 검색했다. 그러나 감도가 영 좋지 않아 통화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고, 와이파이 목록을 훑던 중 역사 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 이름을 발견했다. '여기 보이는 와이파이가 저기 있는 카페 것 같은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신호가 약한 것 같으니 저 카페로 가까이 가서 이 와이파이를 잡아보세요'라고 영어로 전달.
하지 못해 'follow me'라고 당당하게 전달한 후 노팅엄역의 별정직 역무원이 된 마냥 앞장서 걸었다. 예상대로 와이파이 목록에서 카페의 신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여기서는 와이파이 신호가 잘 잡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아마 다시 통화를 시도해도 전화가 끊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영어로 전달, 하지 못해서 'Retry'라고 외쳤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전화가 다시 연결되었고 별 무리 없이 통화하는 것을 확인한 후 자리를 떴다. 남의 와이파이를 보시 받아 1 공덕을 적립하고도 20여 분이 남아 미리 플랫폼을 찾아 내려갔다.
그늘에만 있어도 날이 습하지 않아 쾌적하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기차에서 멍하니 창 밖을 구경해도 좋을 날씨다. 티켓을 살펴보다 뜻밖의 변수를 발견했는데 노팅엄에서 그랜섬(Grantham)까지 30분을 가고 환승해야 했다. 14분을 기다린 후 환승하여 세인트 판크라스 역까지 다시 1시간이었다. 런던에서 노팅엄으로 갈 때 갈아타지 않고 갔기에 단순히 예매만 하고 세부 일정을 체크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나마 환승시간이 빡빡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다른 승객에게 티켓을 재차 확인받아 그랜섬에서도 어렵지 않게 환승했다. 여행의 끝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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