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한 유랑민이 양이의 습속에 맞닥뜨려 곤경에 처하다'라는 기록은 실록에 없으나 내 얘기다. 로마 시내를 도보로 돌아보는 오전투어가 8시 30분이라 일찌감치 7시에 일어났다. 샤워부스 밖에는 배수구가 없다는 주요 정보를 이미 수집한 터라 의기양양하게 몸을 일으켰으나, 곤히 자고 있는 맞은편의 세이렌을 깨울까 싶어 사뿐사뿐 1층으로 내려왔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침대의 사다리가 얇았다는 걸 그새 까먹고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딛는 바람에 절로 '흐악-흐악-흐악'하며 비명이 새어나왔다. H는 묵음이므로 '으악-으악-으악'에 가까웠다.
예상대로 샤워부스, 세면대 등 주요 장소에만 배수구가 있고 맨바닥에는 배수구가 없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준비한 세면도구를 치켜들었는데 샤워 부스에는 선반이 없었다. 그러나 다이소의 3단 세면백은 걸어서 쓸 수 있는 플라스틱 고리가 있기에 잠시 희망을 가졌으나 고리 또한 없었다. 서방의 습속은 세면도구와 배수구를 가까이 두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인가?... 하기야 침대에도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종족들에게는 별 타격이 없을 수도 있겠다. 샤워커튼이나 봉이 있었다면 맨 위를 이용해 걸기라도 했을텐데 단순히 공간 전체를 여닫는 형태였다.
한국에서와 같은 세면은 포기하고 샤워부스 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는 샴푸와 바디워시를 대충 짜내어 몸에 문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샴푸를 하면 양 팔이 벽에 닿을 만큼 좁았다. 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 예로부터 로마에는 공중 목욕탕이 잇었으니 개인 샤워실은 좀 후질 수도 있지 않나. 그래도 온수는 잘 나오기에 콧노래를 흥얼대며 신나게 머리를 감는데 발이 조금씩 잠겨왔다. 부스의 배수능력이 좋지 못했는데 하필 나는 온수를 끼얹으며 평안을 찾는 사람이라, 본의 아니게 소규모의 댐을 만들고 있었다. 물이 빠지고 다시 샤워하기를 수 차례 반복해야 했다.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샤워하러 갈 때까지는 없었던 토르가 아래층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절대 저분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침대에 올라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북유럽에서 로마까지 얼마 안 걸리는지 다소 궁금해하던 와중에 토르가 눈을 뜨더니 내게 인사를 건넨다. 나도 인사를 받으며 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방에는 확실히 더 큰 샤워부스가 필요할 것 같다. 나 정도 되었으니 샤워부스에 살짝 부딪히는 것으로 끝났을 뿐, 토르는 샤워부스를 용서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투어 나서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디 여행 하겠나 싶어 투덜대던 와중에 잠시 딸기의 고장 논산이 떠올랐다. 16인 1실도 써 봤는데 4인 1실쯤이야 싶어 이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숙소를 나서니 음산하기만 했던 로마의 밤거리가 쨍한 로마 제국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흥이 나서 열려 있는 구멍가게에 들러 참치마요 샌드위치와 스타벅스 커피를 사 아침을 때웠다. 투어 집결지는 지하철 '콜로세오'역 출구 옆의 신문 가판대 앞이었다. 우리가 아는 그 콜로세움 앞이다. 아직 지하철 이용에 대한 숙련도도 없을 뿐더러 소매치기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인지 도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걸어서 20여 분 거리였기에 흥도 난 참에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힙색도 소매치기 방지용 보안장치가 있는 작은 가방이라 큰 걱정은 없었다. 핸드폰 또한 어깨와 목에 줄로 한 번 더 걸어서 가방 안에 넣었으므로 사실상 예비용 카드를 제외한 모든 귀중품이 가방에 든 셈이다. 소매치기가 이 로또팩의 존재를 안다면 어떻게든 해먹어보려고 애쓸 것이 분명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짜릿한 역전을 꿈꾸지 않나. 아, 잠시 생각해보니 나는 소매치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만큼 부자는 아니다. 그러나 내가 당한다고 해도 소매치기는 인생여전 소매치기일 것이고 내 인생만 안 여전할 것이니 조금 더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별 탈 없이 콜로세오 역에 도착하여 가이드를 찾고 수신기를 받아 세팅했다. 시내 도보투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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