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런던 8일차 2 (23.08.22)
테이트 모던에서 한 시간 남짓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길게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다. 건물이 양쪽으로 높게 올라가 있어서 그냥 한 바퀴 걷기만 해도 3~40분은 족히 걸릴 만한 규모였다. 이런 곳이 입장료 무료라니, 한국의 전시회 티켓 가격을 생각하면 생경한 지점이다.
무료로 가이드 투어와 질문을 주고받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도슨트까지 그냥 받을 수 있으니 가히 김혜자 선생님의 컨설팅을 받았다고 짐작해볼 만 하다. 첫 타임을 대놓고 점심시간에 배치하여 미술에 진심인 소규모 인원만 선별하는 전략적인 구성을 관찰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작품들과 함께 마티스, 자코메티, 몬드리안, 잭슨 폴록 등등 어디서 많이 들어본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주마간산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여건이 조금 아쉽지만 말 타면서 쓰윽 산 훑어봐도 그 산이 동네 뒷산인지 금강산인지 정도는 식별 가능하기에 그 나름 귀한 구경이었다. 수박 겉을 핥아도 수박맛이긴 하다, 참맛이 아닐 뿐이지.
열심히 다그닥거리던 와중에 문득 궁금해졌다. '짐을 보관소에 맡겨두고 그냥 나갔다 올 수 있는건가...?' 싶어서 마이클에게 우선 물어봤다. 만약 가능하다면 가뿐한 차림으로 주변에서 산뜻하게 식사할 수 있을 테고, 안 된다면 캐리어를 덜덜거리며 시내를 활보해야 할 처지였다. 가방을 보안 검색대에 올려놓는 것도 아니고 육안으로만 확인하는 곳에서, 짐 보관 확인용으로 주는 낡아빠진 쇳덩이가 최첨단 보안기술의 집약체일 가능성은 많지 않았다. 그냥 나가는 것으로 경보가 울리고 문제가 된다면 인간 인지의 한계와 나의 교만함을 반성하며 겸허히 대사관에 인도되기로 결심했다. 아무쪼록 잠깐 둘러보다 보니 입장했던 입구 말고 다른 층에도 출구가 있어서 그냥 슬그머니 나갔다 오면 될 것 같았다. 대강 그러기로 결심하고 화장실을 들렀는데 정말이지 멋진 파워의 핸드드라이어가 있었다.
공간, 조형, 조각 등 다양하게 전시된 미술품들을 관람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 거장들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기념품샵과 카페에는 템즈 강 쪽으로 난 테라스가 있는데 말 그대로 그림같은 풍광이었다.
약속시간이 가까웠는데, 마이클도 짐 보관소에 짐을 두고 그냥 나가는 게 가능한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다. 짐 보관소에도, 전시장 어디에도 딱히 짐을 갖고 나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없기에 설령 안 된다고 하더라도 몰랐읍니다! 찬스를 한 번 쓸 수 있었다. 동양인의 외형을 하고 있는 이상, 부지런할 때는 한국인처럼, 뻔뻔할 때는 중국인처럼, 사과할 때는 일본인처럼 굴면 된다. 계획했던 대로 부지런히 다른 층의 출입문을 찾아가 뻔뻔히 통과했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도게자를 면한 채 마이클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이클이 갑자기 조금 늦게 도착하게 될 것 같은데 핸드폰에 배터리도 없다고 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가 앉아있는 장소를 설명하고 테이트 모던 앞의 벤치에서 기다렸다. 나오고서야 다른 각도에서 보이는 웅장한 외관이 있었다.
마이클은 예정 시간보다 대략 20여 분 늦었다. 내가 도게자를 면한 것은 담당자가 따로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나자마자 마이클은 2017년 자전거 국토종주 때에도 만나기로 한 지점에서 네가 기다리지 않았었느냐며 천진난만하게 그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전통적으로 도게자담당관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2017년에는 무려 두 시간을 땡볕 아래서 기다렸다. 물론 두 시간을 기다릴 생각은 없었으나 기다리다 보니 두 시간이 지난 것이다. 아래와 같이 명확한 사료가 남아있다. 한국 온 지 6주만에 배운 코리안타임이 영국에서는 20분으로 줄어들었으니 확실히 장족의 발전이다.
조금만 걸어가면 괜찮은 버거집이 있단다. 가게 이름이 무려 'LORD NELSON'이다.
가보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