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파리 6일차 1 (23.08.15)
파리의 마지막 아침, 11시까지 체크아웃이라 잠시 누워 계획부터 세웠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갈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캐리어까지 끌고 가는 것은 무리다 싶어 빠르게 포기했다. 갑자기 더해진 캐리어를 견디지 못하고 언덕을 올라가다가 장 운동이 갑자기 활발해지면 어쩌겠는가? 말 그대로 대참사다. 중국동방항공의 물티슈가 아무리 영롱하게 빛난다고 해도 화장실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태리에서는 추가 비용 없이 짐 보관을 하고 돌아다닌 기억이 있기에 호스텔에 맡겨둘 수 있는지 우선 찾아보았다.
때마침 0층에 라커룸이 따로 있었다. 그 곳의 키오스크가 5유로를 내라고 말을 걸었다. 설득 불가능한 상황은 여권을 깜빡하는 프론트 친구를 그립게 만든다. 지금은 한 철 지난, '그 돈이면 국밥먹지' 이론에 따라 5유로에 조금 보태 아침 샌드위치와 커피를 더하기로 했다. 일단 캐리어를 끌고 나왔으니 몽마르트르 언덕은 확실히 포기하기로 했다. 어디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최대 효율을 위해 코인 빨래방.. 아니 카드 빨래방에서 세탁기를 돌려 두고 아침 요깃거리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빨래방에 도착한 후 세탁기를 돌리고 주변을 살피니 나름 굵은 기둥 하나가 실내에 서 있었다. 때마침 사람도 없는 가운데 빨래방도 이용 중이기에, 철제 와이어와 자물쇠를 이용하여 캐리어를 기둥에 붙여 잠갔다. 흡족하게 잠금상태를 점검하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세탁기 앞에서 헤매고 있었다. 성공적인 빨래를 위해 오뚜기밥과 그룹스터디까지 한 이 몸이 나설 차례였다. 배워서 남 주자고 하지 않던가. 위쪽의 세제 투입구를 알려주고 투입구를 꽉 닫으면 된다고 말하려 하였으나 0개국어의 장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Excuse me'라고 이야기하고 그냥 내가 대신하니 그도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역시 말보다는 실천이었고 이제 아침식사를 실천할 시간이다. 조금 걸으니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바게뜨빵을 잘라 속을 채운 샌드위치는 맛이 나쁘지 않지만 빵이 조금 질긴 편이다. 조금의 빵을 예쁘게 잘라서 모양만 낸 그런 샌드위치가 아니라 정말 통짜로 긴 바게뜨빵의 중간을 자른 샌드위치다. 씹다가 이가 한번 어긋나면 꽤 아프다. 망할 빠리바게뜨 망할 SPC. 투덜거리던 중 떨어진 내 빵 부스러기로 비둘기가 모여든다.
그렇게 로마에서 온 성령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물으니 없단다. 그런 가게에는 공용 화장실이 있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내 잘못이다. 그러나 '저 여기서 거사 치를 예정이니까 샌드위치 좀 먹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은 직원용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인접한 가게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2유로의 화장실 이용비를 내면 제로콜라를 서비스로 준다.(아니다) 화폐단위가 이 모양이라 제로콜라 한 캔에 2천 원이 넘는다는 게 얼른 와닿지 않는다. 물론 화장실 한 번 이용하여 콜라값을 1유로로 만든 것이 가장 큰 업적이다.
다시 빨래방으로 향했다. 건조기 두어 번 돌리고 캐리어를 차곡차곡 다시 꾸렸다. 짐을 계속 여기 매어두고 돌아다닐까 잠시 고민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몽마르트르 언덕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세탁 서비스 이용이 끝났는데 캐리어만 매어두는 것은 오랑캐나 할 법한 짓이었다. 게다가 곧 영국에 갈 예정이니 조금 미리부터 신사의 품격을 패치해둘 필요가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을 마주하며 가까운 바스티유 광장까지 대략 500m 가량 걸은 것 같다. 막상 걷다 보니 그럭저럭 걸어다닐 만은 했지만 역시 인생은 오랑캐처럼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