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파리 4일차 4 (23.08.13)
멋진 야경을 보고 그냥 끝내기 아쉬워 약간의 주전부리와 맥주캔을 들고 Chill out room으로 갔다. 첫 날 오리스테이크를 함께 즐겼던 캡틴 코리아가 캡틴 유럽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혼자였다면 여행의 경험이나 일정을 공유할 겸 조금 떠들어 볼 생각이었다. 캡틴 유럽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잠시 기다렸으나 오히려 캡틴 아프리카가 합류했다. 중국을 거쳐 이태리에 도착한 후 자신있게 '쎼쎼!'를 외친 입장에서 거기 끼기에는 조금 무리였다. 푹 쉰 후에 쌩쌩한 뇌를 갖고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오뚜기밥과 베르사유 및 주마등 패키지까지 겪고 야경을 관람했으니 조금조금 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방으로 돌아오니 레이첼이었던 무스타파가 사브리나로 바뀌어 있었다. 변동이 많은 걸 보면 역시 개별 라커룸을 사용하거나 자물쇠를 활용하는 것이 필수이다. 한자를 전혀 모르는 구라파 사람이라고 하여 견물생심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라, 체크인 할 때 단순히 쉬러 왔다고 하더라도 체크아웃을 준비하는 순간 옆 침대에서 고가품을 보는 것은 유혹당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객실 안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추후 의심받는다 하여도 레이첼, 무스타파, 사브리나, 마르게리따, 로버트슨, 까를로스, 파스쿠찌, 곤잘레스까지 같이 용의선상에 오를 텐데 잡아떼면 그만 아닌가.
눕는 순간까지 내일의 시내투어에 대해 고민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나름 6만 5천원짜리 투어인데 가는 게 낫지 않나 싶은 것이다. 일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갑작스럽게 계획을 짜야 했던 상황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돈을 버리는 것은 조금 아깝지만 여행은 여행이다. 여행이 고생스럽고 집이 최고라지만 여행을 고행으로 바꾸는 것은 다른 차원의 영역이기에 투어를 가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엇보다 이미 다녀온 사람이 부모님의 원수가 가는 투어라도 뜯어말릴 것임을 내비쳤지 않던가. 종일 파리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기에, 너무 고생하지 않기로 했다.
샤워는 하고 자려 다시 몸을 일으켰다. 드라이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은 다소 후회되는 부분이지만 이번 여행의 주요 초점은 경량화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선 글에서 기술하였듯, 이 호스텔의 유일한 흠은 드라이기를 프론트에서 빌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산타크로체가 애써 준 덕분에 샤워하고도 빨리 마르는 머리를 갖게 되어 드라이기가 크게 필요치 않기도 하다. 쭉 그래 왔듯 핸드드라이어에 손을 대고 그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려고 손을 가져가는 찰나, 핸드 드라이어의 송풍구와 내 손이 부딪쳐 송풍구가 살짝 틀어졌다.
유로화로 핸드 드라이기를 물어주어야 할까 싶어 살짝 쫄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드라이기를 안 챙겼나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쳐갔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피니 원래 송풍구가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결론적으로는 머리를 말리기 한결 편한 방향으로 송풍구를 조절할 수 있었다. 물론 바람의 방향이 위쪽인 탓에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소가 한번 핥은 듯 한 모양이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기계식 산타크로체인 셈이다. 그러게, 송풍구가 반드시 아래를 향하라는 법은 없는데 이래저래 틀을 깨는 경험이 많다. 좋은 자극이다.
더 나은 방식이 무엇인지 섣부르게 결론 내릴 수는 없으나 많은 방향에서 변화와 개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프랑스의 털-레랑스 또한 한국의 관점에서 다소 이상한 부분이 있겠으나, 한국 반려동물 시장이 더욱 커지고 관련 인식이 변화할 여지가 있다면 조만간 케이지 밖으로 나온 동물을 대중교통에서 마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다시 누웠다. 남은 하루는 시내투어를 따라다니는 것 말고 뭔가 다른 일정을 소화하는 게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려는 계획은 없지만 대혁명의 나라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느낌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