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파리 2일차 2 (23.08.11)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1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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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 키친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방 하나에 8명 묵는 층이 대부분임을 감안한다면 대략 10석 남짓에 씽크대 둘 4구 하이라이트가 놓여진 조리공간 하나 작은 냉장고 두 개가 전부였다. 조리 후 한 잔 하는 공간으로 이동하여 먹는 것을 노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요리에 진심인 사람들이 대거 숙박한다면 프랑스 소혁명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썩 쾌적한 공간은 아니었는데 마침 내가 들어가던 참에 오뚜기밥을 다 드신 여성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역만리에서는 생소한 아이템이라 잠시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오뚜기밥이었다.

냉큼 자리에 앉아 저녁을 준비했다. 먹을거리를 늘어놓고 물을 끓이러 갔는데 하이라이트 사용법이 조금 어려웠다. 자물쇠 표시는 당연히 안전을 위한 잠금일 것이고, 전원 버튼은 내가 사용할 구역을 켜면 되는 것이었는데 플러스 버튼은 아무리 눌러도 가열되지 않았다. 뭔가 놓쳤나 싶어 혹시 동전 넣는 구멍이 있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그런 건 없었다. 하기사 공용 주방을 만들어놓고 조리에 대한 돈을 따로 받는다니, 스크루지 영감쟁이도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를 풀지 못해 잠시 고민하는데 앞의 누군가가 손가락을 미는 시늉을 한다.

마이너스에 손가락을 대고 플러스 쪽으로 밀어올렸더니 작동한다. 기계 입력 방식을 좀 통일할 일이지 온도조절만 스와이프로 해 놓다니 뜻밖이었다. 대충 spicy를 보고 라면을 집었더니 약한 마라맛 라면이었다. 다소 맵고 기름진 국물 좀 보태는 정도로 만족했다. 과자는 링 모양에 onion이 써 있길래 구운양파 비슷한 것을 생각했으나 그냥 밀가루 맛에 가까웠다. 배고프지 않았다면 안 먹지 않았을까 싶다. 다 먹고 쉬는데 뭔가 허전하여 다시 자코뱅의 구멍가게를 찾았다. 이제 6유로부터 카드가 된다는 룰을 알고 있으니 현금을 챙겼다.

맥주 두어 캔 갖고 Chill out room으로 들어서니 어제 보았던 왕 청년이 '저 김치 또 술 푸네' 하는 인자한 웃음으로 나를 맞았다. 각자의 발음을 알아듣기는 조금 어렵고 번역기까지 사용하는 수고를 들여 소통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럭저럭 번갈아 웃음만 주고받는 정도였다. 밤이 조금 더 깊자 왕 청년이 소파에 파묻은 몸을 세워 기지개를 켜더니 너무 춥다며 퇴장했다. 때마침 샤워하고 방으로 돌아가던 캡틴 코리아와 눈이 마주쳐 인사했다. 하루를 꽉꽉 채워 돌고 온 모양인데, 5만원짜리 여행코스를 짜도 10만원어치 돌 수 있는 나이라 약간 부럽기도 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확인한 호스텔의 구조는 E성향의 영어 능숙자에게 확실히 유리하다. 사람을 만나고 친구를 만드는 것도 여행의 일부인데 낯을 덜 가리고 영어를 쓴다는 것은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0어가 능숙하지 못한 것은 사실상 0개국어에 가까운 상황을 만든다. 물론 조선의 폐쇄적인 사무실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영어가 능숙했다고 하더라도 넘기 어려운 벽이 있었을 것이다. 파파고는 커뮤니케이팅을 가능하게 해줄 뿐이지 커뮤니케이션을 즐겁게 해주지는 못한다. 아차차, 커뮤니케이팅으로 충분한 처지에 잠시 신성모독을 해버렸다.

룸메이트를 잘 만나야 한다는데, 지금까지 만난 이들도 무난했다. 호스텔 이용 후기를 보면 코를 심하게 곤다거나 누군가 이갈이를 하여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있다. 심지어 커튼만 치고 해피타임을 갖는 남녀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그런 상황은 없었다. 그런 비도덕적인 상황이 생긴다면 평안한 숙면과 진귀한 구경을 위해 추후 뺨따구를 맞더라도 커튼을 제쳐볼 법 하다. 호스텔 프론트에는 콘돔이 진열되어 있다. 그게 8인실의 투숙객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바로 옆에 이어플러그가 진열되어 있다. 역시 자유와 평등과 박.. 아니다.

내일은 오전 오르셰미술관 투어와 오후 루브르박물관 투어가 있다. 하루 넉넉히 다니기를 잘했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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