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파리 1일차 2 (23.08.10)
밤이 깊었으니 적당히 두어 캔만 보태기로 했다. 여행 출발 후 혼자서는 처음 곁들여보는 맥주였다. 옆에 누구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혼자라 안전에 대해 조금 더 곤두선 탓이었을 것이다. 복도 중간에 Chill Out Room이라는 방 이름이 있다. 서구권의 라면 먹고 갈래? 가 '넷플릭스 앤 칠'이라는 정도를 용케 알고 있어 모국어로도 사용해본 바 없는 단어를 접하고 대강 그런 용도의 방임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호스텔의 구석구석에는 환경에 관한 메시지가 꽤 많이 붙어 있다. 세이브 더 에너지와 비슷한 종류의 그런 메시지들이다.
미래지향적인 숙소로구만- 생각하며 Chill Out Room을 열었는데, 추웠다. 한 층에 골고루 틀어야 할 냉방이 한 방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원체 추위를 잘 안 타는 나도 한 20여 분 있으려니 추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밍기적대며 핸드폰하다가 홀로 여행 온 한국인과 잠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 다녀와서, 호주로 유학가기 전에 배낭여행 왔다고 한다. 대부분의 스포츠를 좋아해서 파리 생제르맹에 입단한 이강인의 경기를 12일(토)에 볼 예정이란다. 앳되어 보이는데 전역했다고...? 싶어서 내 연로함만 되새겨질 뿐이었다.
전역 직후면 아무래도 체력이 가장 빵빵할 시기라 유럽여행과 궁합이 매우 좋다고 할 수 있다. 캡틴 코리아를 만난 김에 내일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캡코의 첫 일정을 들어보니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것이란다(...) 따라서 내 퐁피두센터 투어에 시간을 맞추기로 했다. 11시 투어에 13시 30분 종료 예정이었으므로 대략 2시쯤 조금 늦은 점심으로 정했다. 일정도 나왔겠다 뜨순물로 샤워하고 자려고 샤워실로 향했다. 그런데 벽면 쪽으로 누르는 샤워 레버는 대략 10초 물을 뿜으면 레버가 다시 튀어나와 물이 끊기는 구조였다.
따뜻한 물을 계속 끼얹으며 정신을 느슨히 하는 내게는 좋지 못한 구조였다. 환경은 중요한데 에어컨은 빵빵하게 틀고 물은 아끼는 게 영 상쾌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꼬리뼈로 기대어 레버를 계속 탄압했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샤워를 마치고 들어오니 대부분의 자리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빌트인 형식의 이층 침대라 왕 대인의 이케아보다 내구도가 월등하여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도 그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로마제국과 달리 과체중자도 너끈히 밟을 만큼 넓은 사다리였다. 아무리 못해도 10,000~15,000보는 걷게 되니 눕는 순간이 천국이었다.
전쟁터에서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고지를 먼저 점령하듯 2층 침대를 점령하는 것도 비슷한 효과가 있는데, 핸드폰을 충전시키고도 침대 가장 안쪽에 둔다면 쉽게 팔이 닿지 않는 크기여서 안심되기도 했다. 적어도 파리에서는 골이 울리는 베개 밑 알람을 잠시 멈춰도 좋을 것이었다. 다만 잠가 놓은 캐리어나 개인 사물함에 넣은 무언가를 꺼내려면 그 때마다 2층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은 귀찮았다. 또한, 카드키를 침대 안쪽에 둔 채로 밖에 나가려 1층으로 내려간다면 여지없이 다시 사다리를 올라 카드키를 챙겨야 한다. 침대 안쪽이 아니면 딱히 어디 카드키를 두거나 거치할만한 곳도 없다.
약간의 생활체육 권장형 숙소지만 조금만 적응되면 금세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 듯 싶었다. 4층에는 Guest Kitchen이 있다는데, 공용 주방시설을 살필 겸 내일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1층에 The people이 쓰여진 몇몇 기념품들이 있어 둘러보던 중 모자가 눈에 띄었다. 산타크로체의 솜씨를 가리기에 적합한 것 같아 잠시 혹했다. 물어보니 가격도 10유로라 살 법 하다 싶어 머리에 얹었는데 말 그대로 얹어지기만 했다. 모자는 얹는 게 아니라 쓰는 건데, 얹어지는 게 전부인 바람에 그냥 잠이나 자기로 했다. 무사히 파리에 도착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