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파리 1일차 1 (23.08.10)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17.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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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입국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다. 이미 피렌체에서 수속을 마쳐서인지 그냥 출구로 나가면 그만이었다. 투어만 예약해두고 디테일한 이동까지 알아보지 않은 무계획자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정보다. 그래서 곧장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갔다. 내가 타야 할 열차노선 RER B와 가야 할 역을 가리키니 마드무아젤이 이내 주섬주섬 관광 안내도를 챙겨 출발역과 종착역을 형광펜으로 표시하여 건네준다. RER B 안내판을 따라 계속 걸었다. 열차를 타고 한 차례 지하철로 환승해야 했고, 이 때 프랑스의 교통카드 '나비고'를 구매하여 10회 탑승을 충전해두었다.

이번에 묵을 호스텔은 '더 피플 파리 마레'였다. 근처에 내려 구글 지도를 보고도 주변을 한참 헤매야 했다. 내장버거집과 같은 원리로, 도저히 호스텔이 아닌 것 같은 번쩍번쩍한 높은 빌딩이 호스텔이었기 때문이다. 왕 대인이 다시 왕 서방이 되는 순간이었다. 호스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한국 노래가 들렸다. 반짝했다가 처지가 아쉽게 된 가수 문문의 노래와 소유의 발라드가 흐르는 동안 체크인. 여권을 보여주고 카드키를 받는 동안 데스크의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언젠가 한국에 꼭 가 보고 싶다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카드키만 주고 여권을 까먹는 것을 보아하니 진심인 듯 하다.

아무튼,  '더 피플'은 일종의 호스텔 브랜드인 듯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난관이 닥쳤다. 분명 내 앞에 체크인한 서양인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는데, 내가 탄 엘리베이터는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테크니컬하게 인종차별을 할 리는 없어 주변을 살피니 튀어나온 검은 네모가 있었다. 뇌리에 스치는 바가 있어 카드를 태그하고 버튼을 누르니 그제서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론 누가 카드를 줍거나 훔쳐다 쓸 수도 있지만 보안이 확실한 집이다. 왕 서방의 열쇠꾸러미보다는 신식인 것이다.

호스텔은 총 7층, 내 방은 520호였는데 몇몇 여성전용 호실과 혼성 호실, 적은 인원이 사용하는 호실이 층별로 나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안내에 따르면 4층은 공용 주방, 5층은 공용 휴게실이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의 공간은 같지만 남녀로 구분되어 있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공용 드라이기가 비치되어 있지 않아 프론트에서 대여해야 사용할 수 있어 다소 번거롭다. 추가로 호실에 들어갈 때도, 샤워실과 화장실에 들어갈 때도 모두 카드를 태그해야 했다. 이건 보안이 철저한 정도가 아니라 급똥 앞에 X되는 구조다.

숙소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신호가 오는 순간, 그는 카드키를 방에 두고 화장실로 뛰쳐나갈 가능성이 높다. 이성이 마비된 채 섣불리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애쓰는 순간 그는 복도에 표류할 수밖에 없다. 아무 호실이나 두드리며 다국적 관광객에게 애처로운 바디랭귀지를 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카드키를 항상 핸드폰과 가까이 두었다. 미리 X됨 시뮬레이션을 돌린 덕택에, 숙소에 머무는 동안 응급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가 2층인 것은 다소 불만이었으나 침대 천장이 높고 상단에 선반까지 있어 자주 쓰는 짐을 늘어놓기에 최적화된 구조였다. 훔쳐가도 다시 사면 그만인 그런 것들 말이다.

체크인을 마치니 약간 허기져 밖으로 나왔다. 마레 지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깔끔하고 치안이 좋은 편이라고는 들었는데 직접 보니 서울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밤거리였다. 다만 연 가게가 별로 없다는 점이 크게 달랐다. 마트가 늦게까지 열지 않는다는 것은 들었으나 혹시 구글 태양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을까 싶었고, 작은 구멍가게를 찾았다. 처음에는 과자와 제로콜라나 조금 먹을 심산으로 카드를 내밀었더니 카운터를 지키던 로베스피에르가 카드는 6유로부터라고 얼굴을 찌푸린다. 망할 수수료 장사 같으니. 냉큼 맥주 두어 캔을 집어오니 그제야 표정이 풀린다. 단두대에 오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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