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피렌체 2일차 3 (23.08.09)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1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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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돌아다니면 지갑이 살살 녹는다. 맨날 천원 만원 단위로 돈을 쓰다가 일의 자릿수로 쓰여진 가격을 보면 잽싸게 셈하기 어렵다. 한인마트의 물건들도 마찬가지라 대개 3유로부터 시작인데 방심하는 순간 3~4천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마트의 카운터는 린쟈오밍이 지키고 있었지만 진열대에는 동북아의 온갖 상품들이 두루 놓여 있었다. 삶을 경작하는 농민의 입장에서 농심(農心)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신라면 큰컵과 봉지라면 김치를 골라들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손에 든 라면을 보더니 왕 대인께서 씨익 미소지으며 구석에 있는 전기포트를 가리킨다. 얼큰한 국물은 동북아의 공용어다.

봉지라면도 구매하였기에 혹시 물을 끓일 수도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냄비나 가스렌지는 없었다. 약간의 열악함이 체감되는 때는 있으나 왕 대인의 전기포트와 민족 전통의 조리법으로 내려오는 뽀글이가 있기에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뽀글이는 젓가락으로 봉지의 주둥이를 닫는다 한들 심혈을 기울여 균형을 잡아야 하기에, 머리 끝까지 피곤이 올라온 상황에서 적합한 조리법은 아니었다. 미리 사둔 큰 생수통을 가져와 전기포트로 물을 끓이고 싱글벙글하며 신라면컵의 뚜껑을 열었는데 흡사 곰팡이처럼 보이는 초록색 원이 뚜껑 안쪽의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유통기한을 먼저 보았더니 2024년 3월 전까지가 Best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곰팡이라면 곰팡이가 핀 라면이 최선은 아닐텐데 싶어 왕 대인께 이 상품이 괜찮은 것이 맞느냐고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왕 대인의 넓은 도량이라면 이 정도 쯤은 가볍게 괜찮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면 정도는 끓는 물로 살균하기로 타협하고 뚜껑을 완전히 제거했다. 대강 쓸 만한 종이 덮개를 찾아 올리고서야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오래 전 중국에서 만났던 신라면에는 플라스틱 포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아 챙겨온 나무젓가락을 사용해야 했다. 뭐 그 정도 쯤이야.

4분이 지난 후 크게 한 입 하며 민족혼을 충전하려는 찰나 뒤에서 누가 인사를 건넸다. 일본인 부부가 밝은 얼굴로 왕 대인께 체크인하고 있었는데, 신라면을 아는 눈치였다. 대강 주워듣기로는 나와 묵는 층이 다른 것 같았다. 내가 묵는 층에만 4개의 방이 있는데 방마다 4명이 묵는다. 위층도 있다면 최소 30여 명은 족히 지낸다는 것이라, 왕 대인의 사업 수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피렌체의 중국 자본을 뒤로하고 다시 민족혼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티본스테이크도 까르보나라도 별미였지만 익숙한 것만 못한 때가 있다. 온 세상을 누비며 쉴 곳을 찾아다녔으나 구석진 내 방이 제일이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라면을 다 먹어갈 즈음 일본인 부부도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갔다. 나도 스즈메와 문단속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새 펠리페도 체크아웃했는지 짐이 바뀌어 있었다. 내 아래 침대에도 중남미 계열로 추정되는 다른 여성분이 있었고 옆 침대에도 멕시코에서 온 붉은 머리의 여성분이 있었으나, 온 신경이 발에 쏠려 있었다. 낮에 약국에서 산 물집패드를 꺼냈으나 일단 씻어야 뭐라도 붙이지 싶어 샤워실로 향했다. 물집으로 인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수상하게 바라보는 왕 대인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달궈진 철판 위를 뒤뚱대는 오리처럼 걸어야 했다.

씻고 패드를 붙이니 확실히 고통이 줄었다. 6매 들어있는 패드가 12유로 정도였으니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크기에 족히 3천원 정도인 것이다. 조금 살만해지자 그새를 참지 못하고 손빨래를 하러 샤워실로 향했다. 몇 번 하고 보니 적응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힘이 부치기도 한다. 옛 영화인 '싸움의 기술'에서 백윤식이 맞고 다니는 재희에게 싸움 기술은 안 가르치고 있는 힘껏 빨래를 쥐어짜게 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빨래줄에 널고 나니 그럭저럭 자정이라, 개운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피렌체의 일정을 너무 촉박하게 잡은 듯 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뭐 어떠한가, 또 올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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