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피렌체 1일차 2 (23.08.08)
베키오 다리는 피렌체의 야경 명소 중 하나다. 팔찌 강매로부터 도망쳐 쉴 계획이었는데 앨리는 신날 계획이었는지 건물 사이의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일몰을 보러 가자고 한다. 나도 기분파일 뿐더러, 둘이 가는 게 혼자 가는 것보다는 당연히 덜 힘드므로 그러자고 했다. 노을진 풍경이 감탄스러웠는데 괜히 커플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앨리도 옆에서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내게 isn't it?이란다. Yes는 밋밋하고 really는 발음과 느낌이 안 살고, 그 이상 표현하기에는 내 영어가 짧다. 조용히 사진을 더한 후 내 노트북 배경화면을 바꿀 것이라고 하였는데 다행히 잘 전달된 것 같다.
초코티라미수 젤라또를 맛보며 숙소로 돌아왔다. 어디서 또다시 조오나큰단이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다. 체크인했을 때 만났던 펠리페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 꽤 오랜 여행을 다닌 모양이었는데 모든 발음에 'ㄹㄹㄹㄹㄹ-'가 섞여 있는 스페인 친구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영어로 재차 언급하면 펠리페는 'That's ㄹㄹㄹㄹRRR-ight!'이라며 좋아했다. 셋이 있었으면 대화가 조금 더 길어질 법도 했는데 다른 일은 없었다. 손빨래를 조금 해두고 자면 좋을 것 같아 방에 여행용 빨랫줄을 설치했다. 잠시 후 왕 대인이 빨랫줄을 발견하더니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호스텔 뒤편 마당에 긴 빨랫줄 다섯 개가 연달아 있었다.
역시 왕 대인께서는 다 계획이 있었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고 오히려 빨래가 잘 마를 만한 공간이었기에 소작농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케이를 연발했다. 그런데 웬 걸, 옵션에서 보이지 않았던 드럼세탁기가 마당으로 향하는 문 바로 옆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EU레카를 외치며 왕 황상께 혹시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아쉽게도 황상께서는 공유하는 세탁기가 아니라며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애초 옵션에 없었던 것이니 어쩌겠냐마는 바로 옆에 꿀통이 있는데 꿀을 퍼먹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로써 즉위에 실패한 왕 대인을 뒤로하고 화장실에서 손빨래 후 샤워까지 마치니 거의 12시였다.
앨리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눌 때까지 펠리페는 들어오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눈치와 배려심에 감복하며 잠시 대화를 이어갔다. 여차저차 인스타그램을 서로 팔로우하고 보니 앨리는 멋진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대문자 P였다. 근처에 멋진 자연이 있는 숙소를 선호하는 듯 한데 어쩌다 왕 대인의 숙소까지 온 것인지는 다소 궁금했다. 물론 내게는 세탁기가 멋진 자연이었지만 왕 대인께 저지당하는 바람에 평범한 숙소가 되었다. 돌아다니며 촬영한 사진을 앨리와 공유하며 언젠가 한국에 오면 가이드해주겠다고 하니 내가 오리건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피식 웃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7년 전 자전거 국토종주 때 만났던 마이크 역시 런던에서의 가이드를 자청했었고, 실제로 이번 여행 일정에 런던이 포함된 것을 보면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알기가 어렵다. 아무튼 그 정도가 앨리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나는 나대로 투어 일정에 맞추어 나갔고 앨리는 숙소를 옮겼다. 언젠가 타투를 한 사람은 끊임없이 그 스스로의 '정상성'을 증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한국 사회가 갖는 일종의 강박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로마 숙소에 비해 에어컨은 확실히 월등했다. 씻고 약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누우니 이번 여행에 천당을 포함했는지 살짝 헷갈릴 정도였다. 다만 건조한 것은 어쩔 수 없어 갈증이 심했다. 왕 대인께 마실 물이 있는지 물어보니 태연히 씽크대를 가리킨다. 석회가 다량 함유된 물을 마시고도 대인처럼 멀쩡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일단 감사만 전하고 잠시 숙소 밖으로 나왔다. 12시-1시에 연 곳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 5분 거리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으로 가서 자판기의 생수를 뽑아 마셨다. 이번 여행에 천당 일정이 있었던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