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레카]로마 3일차 3 (23.08.07)
이탈리아의 카페는 말이 카페지 꽤 많은 메뉴를 취급한다. 포지타노 초입의 카페도 마찬가지라 여러 디저트와 맥주와 요깃거리가 공존상생중이었다. 레몬의 속을 파내어 과육과 샤베트를 채운 디저트류와 함께 이탈리아 국민맥주로 취급받는다는 레몬맥주 페로니를 주문했다. 가격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힘든 건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귀국한 나다. 발이 좀 멀쩡했으면 계단을 올라 포지타노 위쪽까지 올라갔을텐데, 못 올라갈 것은 아니었지만 내일의 바티칸 투어가 남은 상황에서 크게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까탈레나가 서빙해준 디저트와 맥주를 즐기며 멍하니 해안을 응시했다. 누군가는 수영복을 챙겨와 잠시라도 지중해에 몸을 담갔고 누군가는 사진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괜히 흥이 나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거리의 시인들을 경계하느라 길에서는 꽂아본 적 없는 이어폰이다. 대강 흥얼대다 보니 페로니가 금세 동나 한 병을 추가했다. 귀국 이후의 내게 소소한 조의를 표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다시 모일 시간까지 40분이 넘게 남아 있어 여유로웠다. 한 병을 더 할까 고민하다가 지중해의 주정뱅이가 되기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잠시 대기하다가 화장실만 이용했다.
다음은 페리를 타고 살레르노로 가는 것이었다. 페리 탑승은 이 투어를 다른 남부투어와 차별화하는 핵심인데, 날씨가 워낙 변화무쌍하여 배가 반드시 뜰 수 있는 것은 아니란다. 다행히 탑승 가능한 날씨였기에 줄서서 페리의 도착을 기다렸다. 배가 들어오자 믿을 만한 팔뚝을 가진 조르지오가 잽싸게 밧줄을 받아 부둣가에 묶었다. 곧바로 페리 3층으로 올라가 자리잡고 앉았는데, 출항 후 뒤로 서서히 멀어지는 포지타노가 한 폭의 그림같았다. 많은 유명인들이 극찬을 남긴 것에 확실히 공감이 갔다. 페리는 아말피 코스트를 거쳐 살레르노에 도착했다. 버스 탑승 후 곧바로 로마로 향했다.
올라오는 길에 듣는 테오 형님의 라디오가 인상깊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다양한 이야기도 좋았지만, 늘 깨어 있고 늘 사랑하고 늘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여기서 다시 듣는 것은 마음을 회복하고 새로운 다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되도록이면 그렇게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도중에 잠시 지체되어 예정 시간보다 다소 늦게 로마에 도착하였고, 버스에서 내리니 9시 40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니 포지타노에서 아무런 요기도 하지 않고 지중해의 주정뱅이가 될 뻔 했을 뿐이라, 배가 살살 고팠다.
돌아오는 길에 테오 형님이 추천한 식당 중 늦게까지 여는 중식당에 들렀다. 이태리에서 추천하기에 좀 그렇긴 하지만 한입 하자마자 사천성에 와 있는 줄 알았다고 했으니 도전할 가치가 충분했다. 다만 가는 길에 테르미니역 건너편 맥도날드가 있었다. 출국 전 들른 모든 블로그에서 통과를 극구 만류하던 거리였다. 거대하고 노랗게 빛나는 M자가 주는 안정감이 있는데, 그런 게 통하지 않는 곳이다보니 돌아서 가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경로로 들어서니 알아서 재탐색되었다. 한 200m는 더 걸었던 것 같다.
한밤의 200m는 사실상 2km라 조금 기진맥진할 무렵 가게가 보였다. 안에는 뜻밖에 오늘 투어에 혼자 왔던 두명 중 한명인 태프트가 홀로 앉아 있었다. 가쓰나가 없기에 태프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냉큼 합석했다. 완탕면과 마라샹궈, 새우볶음면을 칭따오와 함께 나눠먹고 반반 계산했다. 더치페이가 꽤 일상적인지 전체 금액을 카드기에 절반씩 입력하고 결제하는 게 전부였다. 알알한 마라맛은 오랜만이었는데 모든 음식이 칭따오와 잘 어울렸다. 다만 이제 자오둥공항에서 4-5위안이던 것이 4-5유로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소 지나친 품위유지비를 뒤로하고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오던 중 갑작스레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음식과 술을 실컷 넣었더니 뱃속에서 자체적으로 밀어내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지도를 보니 숙소까지는 대략 10분, 로마 제국의 한복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삼보일배의 심경으로 간신히 한 발짝씩 내딛는 가운데 혹시라도 거리의 시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멈추게 될까 조마조마했다. 그처럼 최악의 경우를 만나게 된다면 재빠르게 인간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이 적절한 호신술이 될 수도 있겠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아, 숙소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밤하늘이 퍽 노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