探: 여행

[EU레카]장거리 비행 2

매번 꺾이는 마음 2023. 8. 6.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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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2까지 쓸 생각이 없었던 비행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말 그대로 장거리이기 때문이다. 시속 677km로 날아가고 있음에도 4시간 30분 가량이 남았고 이륙한 지 어느덧 9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지루해 죽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마더 로씨아의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보며 재수가 영 좋지 않으면 종착지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스트까지는 몰라도 비즈니스석의 효과가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자리는 또 희한하게 좌석 단말기 내 'information'항목이 작동하지 않는다. 별 수 없이 공석인 옆자리의 단말기를 켜 항로를 확인하고 있는데, 나를 일코노미로 옮겨 준 승무원이 의문을 품을 만한 그림이다. 아참, 시차는 점점 벌어지는 가운데에도 배꼽시계는 정확하여 기내식을 받는데 점심때와 달리 선택권 없는 'Rice'였다. 돼지고기카레에 햄 등 그 나름의 맛은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에 'Noodle' 먹었지 싶다.

그냥 반팔에 반바지로 창가 비상구 근처 좌석에 앉으니 뜻밖에 비행기에서 우풍(?)을 겪는다. 이런 때를 대비하라고 담요를 나눠준 것이겠으나 원체 열이 많고 땀도 잘 나는 편이라 뜻밖에 기개를 과시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고 깜빡 졸았다. 배부를 때 맛있게 느껴지는 음식이 진짜 맛있는 것이듯 수면친화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찾아드는 수면은 진짜 피곤하다는 뜻이다. 국적 모를 어린아이가 간혹 칭얼대며 울어제끼는데 그럷 만도 하다.

약 4시간 남은 비행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를 지나는 중이다. 대강 북반구에 걸쳐 둥근 곡선을 그리는 항로이다. 도착예정시간이 21시 40분께면 아무리 입국절차를 빠르게 마쳐도 22시는 넘을 것 같은데, 그 시간대의 기차가 있는지 딱히 현지 상황이나 여건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같은 항공편을 탄 사람 중에 택시 동행을 찾아보아야 하나 싶다. 기차로 이동 후 곧바로 숙소에 들어가서 이태리식 짝귀 내지 아귀를 마주칠 확률을 줄이고 안전하게 빨래나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때마침 두 번째 간식이 나오고 있는데 구성은 전과 같다. 카스테라의 맛이 군용 전투식량의 파운드케이크를 생각나게 하는 오묘함이 있다. 물론 식감은 압도적으로 좋다. 식감까지 전투식량과 같았다면 제 아무리 중화인민공화국의 기업이라고 해도 경영난에 직면했을 것이다. 맛과 별개로 밥 두번 간식 두번이면 나쁘지는 않다. 슬슬 로씨아의 영공을 벗어나려는 중이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근처에서 비스듬히 남향한다.

거의 모든 창문 가리개가 닫혀 저녁과 밤 같은 분위기가 유지될 뿐 가려진 창문 틈새로는 밝은 바깥빛이 감돈다. 해가 늦게 진다고는 들었으나 21시 40분을 너무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여행이란 게 원래 알던 세계의 법칙과 규범이 뒤흔들리는 과정이니 이상하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시간을 거꾸로 달리고 있어서인지 12시간이 지난 후에도 백주대낮이면 생경하지 않을까 싶다. 3시간 30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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