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想] 좋은 조직은 어떤 조직인가? (3)
좋은 조직의 조건으로 '교육적 맥락이 잘 작동하는 조직', '좋은 리더가 있는 조직' 두 개를 꼽았다. 다음으로 나올 것은 뻔해서 중요하다. '소통에 막힘이 없는 조직'이다. 1 더하기 1로 최소한 2.5 이상을 쌓아야만 조직을 만든 의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1 더하기 1로 간신히 1을 해내는 것도 먼 이야기가 아니다. 불통인 곳이 그렇다. 내가 0.5만큼 하고 있는 줄 모르고 상대도 0.5만큼 하고 있으면 결국 한 명은 없는 셈이다. 나머지 0.5를 둘이 함께 하든, 둘 중 한 사람이 도맡아 하든 이미 지나간 0.5만큼의 소요시간은 그대로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쉬울 수 있다. 내가 0.5 한다는걸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다. 0.5를 어떻게 접근하여 어떤 방법으로 하고 있으며 어떻게 끝낼 것인지가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일차적 문제이다. 그게 잘 전달되면 다인가? 아니다. 상대는 그 방법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동의하지 않는 경우 상대가 취할 수 있는 표현방식은 다양하다. 면전에서 부정할 수도 있고, 당신의 선택이라면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며 겐세이(?)를 놓을 수도 있으며, 그런 방법을 취하면 한 100년은 걸릴 것 같다고 비꼴 수도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도 이럴진데 팀 규모로 확대해보면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앞서 이야기한 교육적 맥락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초짜와 경력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경력자에게 당연한 것이 초짜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야?'라는 생각을 초짜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럼 초짜의 선택은 어떻게 되느냐. 번번이 반려당한다.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그럼 초짜는 생각한다. '아니 어차피 멋대로 할 거면서 도대체 왜 선택권을 주는 거지?'
그럼 경력자는 생각한다. '요즘 초짜들은 왜 이렇게 생각이 없고 자기중심적이지?' 당연하다. 맥락을 모르니까. 고려해야 할 조건들을 모르니까. 처음이니까.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 경력자는 교육을 담당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초짜들에게 이게 왜 이래서 이러한지를 알려줘야 한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오니까 출장갈 때 우산을 챙겨야 해요. 하는 정도이다. 다만 경력자가 이걸 자각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아니! 장마철이면 당연히 비가 많이 오는데! 그럼 당연히 비가 오는 거 아니야? 중요한 문제는 초짜가 장마철을 가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초짜는 다시 생각한다. '아니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산은 왜 챙기래?' 이게 정확히 소통이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경력자가 여러 명이고 초짜가 여러 명이면 문제는 더 깊어진다. 경력자 여러 명의 의견이 정확하게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짜가 담당자여서 초짜에게 결정하라고 한다 치자. 그걸 결정해서 올려보냈더니 경력자 한 명이 의견을 제시한다. 그 의견에 맞추어 수정하여 다시 올린다. 이번에는 다른 경력자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그 사항에 맞추어 다시 수정한다. 그러면 또 다른 경력자 혹은 경력자 위의 상급자가 이유를 묻는다.
직장이 아무리 본인의 부족함을 깨닫고 정진하는 곳이라고 하지만, 내가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초짜 또한 내가 못하는 게 당연한데 왜 안 알려주는지 투덜대기만 할 일이 아니지만, 뒷사람이 어지러이 걷지 않도록 눈길에 어지러운 발자국을 남기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분명 타고난 자질의 차이가 있기야 하겠다만, 나는 후세가 갖는 대부분의 잘못이 선임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후임의 잘못 같은가? 뭐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인지상정은, 선임의 책임을 다하면 후임이 그 노고를 보아서라도 따라가려 애쓰기 마련이다.
다시 묻고 싶다. 충분히 노력했나? 먼저 그 길을 걸은 당신들이 가진 것을 전승하고 나눠주기 위하여 충분한 노력을 기울였는가? 그럼에도 후임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후임들의 잘못이 맞다. 그러나 충분한 노력이 담보되지 않은 가운데 후임들에게 '요즘 것들이 충분히 알아보려는 생각이 없다', '요즘 후임들은 물어보고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 따위의 이야기를 주워섬길 수 있는가? 미안하지만 나서서 가르치면 편해지는 것은 결국 선임인 그대들이다. 대관절 무엇이 꺼려져 후임들과 소통을 피하며 후임들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숨어 살아가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 선임도 선임의 권위를 내려놓고 후임도 후임이라 위축되는 부분들을 접어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꺼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나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꺼내 놓는 것이기에, 그렇게 꺼내어진 모든 이야기들이 수용될 필요가 있다. 현실이 그러한가? 선임은 선임의 이야기를 않고 후임은 후임의 이야기를 않는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가 없어서이다. '저 사람들이 이해하겠어?' 양측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 거다. 선임이 왜 저러는지, 후임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만 있어도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체력 낭비가 줄어든다. 의도를 명확히 전달할 수만 있다면 서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논의할 여지가 열린다. 그러지 않으면 적대 뿐이다. 요약하면 '저 새낀 왜 저래?' 이게 전부다. 그러니까 모두들 겉껍데기를 좀 버렸으면 좋겠다. 이래서 이렇다 저래서 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이 조직 내에서 그리 어렵나? 같은 조직에 속한 이상 운명공동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소통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든 단지 얄팍한 핑계든 입을 닫는다.
상하관계가 뚜렷한 한국 사회에서 선임이라는 것은 대개 그 자체로 권력이다. 조금 더 경험했다는 이유로 조금 더 옳은 판단을 할 것으로 간주되며, 조금 더 공헌했다는 이유로 조금 더 많은 이익을 누린다. 나는 그에 따른 책임이 후세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임을 잘 양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맡았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해낼 수 있도록 생각하고 힘써서 계도하는 것. 자신의 역할이 갖는 긍정성을 조금이라도 더 확대할 수 있도록 신경써서 전달하는 것. 그것이 나는 선임이 갖는 최소한의 책무이자 최대한의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선임인 당신은 충분히 책임지고 있는가?